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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영화제에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관객과 업계를 소외시킨 채 소수의 프로그래머들에게 독점당하는 영화제들

“타쇄구세계, 창립신세계” 포스터

어쩌면 필자가 그저 너무 많은 영화제에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문화혁명이 올 때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마오쩌둥주의 포스터에 쓰였던 대로 “타쇄구세계, 창립신세계”(打碎舊世界, 創立新世界)같이 말이다.

영화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다. 인정받기 위한 초기의 투쟁(1950년대), 보수주의 세력과의 결정적 대결(1960년대), 그리고 ‘대약진’(1980~90년대). 그러나 이제 현 체제의 중심에 ‘독초’가 자리잡고 있고, 만약 영화제가 일반 영화관객과 업계 그 자체에 진실되려면 그것을 뽑아내야 할 것이다.

영화제는 누구를 위하여 운영되는가? 소그룹의 프로그래머/비평가들, 아니면 세계영화에 관심이 있는 일반 관객? 매년 본인이 참가하는 영화제들의 실망스러운 수로 판단컨대, 점점 더 전자가 돼가는 것 같다. 동양과 서양, 북반구와 남반구의 영화제들은 서로의 프로그래밍을 모방하고, 유행하는 똑같은 비평관점을 채택하고, 창피스럽게도 확립된 영화업계들을 소홀히 하면서 다들 똑같이 “부상 중인” 영화업계들을 찾아 나선다.

영화 선정가들의 세계가 얼마나 작은가 하면, 한 사람이 결국 여러 영화제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유럽의 주요 영화제 두곳은 같은 사람을 아시아 고문으로 두고 있는데, 그는 또 다른 동아시아 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똑같은 영화들이 이 행사에서 저 행사로 다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게 똑같은 무의미한 슬로건을 읊어대는 지역의 비평적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오직 최고의 영화를 심사하기보다는 정치적 성명을 하기를 더 선호하는 심사위원들이 주는 상을 받아 떠오르면서 말이다.

슬픈 일은 비평가/고문/프로그래머로 이루어진 이 특권적 서클 밖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정말로 이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영화들은 영화제의 산소 텐트 밖에서 바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더욱 슬픈 일은 프로그래머들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만드는 영화들의 모음을 숟가락으로 떠받아 먹은 일반 관객은 세계영화에 대해서 직접 의견을 형성할 기회를 강탈당한다는 데 있다.

마오쩌둥 주석의 생각이 옳았던 듯. “반동적인 부르주아 학계의 ‘권위자들’을 비판하고 거부하라!” 그러나 지금까지- 특히 영화제에 대한 비판이 결코 제일 중요한 프로그래밍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지 않는 아시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징조를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합의와 교감이 일어나는 한국에서는, 영화에 대해 신선한 평등주의적 관점을 가진 새로운 충무로영화제가 심지어는 프로그램 카탈로그에서도 (약간은) 새로운 모습을 시도하며(이건 충격이다) 작은 출발을 했다. 동아시아의 몇몇 다른 영화제들에서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비평적 파시즘과 프로그래밍 엘리트주의의 독초가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모두의 영화제에 진정한 평등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길고 느린 투쟁이 될 것이다.

2주 전 런던영화제에서 한 중국인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다. 요즘 중국 본토영화가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얘기하면서, 그런데도 지난 한해 내가 중국에서 본 훌륭한 영화 중 얼마나 적은 수만이 국제영화제에 나타날 수 밖에 없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즉각적으로 런던영화제의 아시아 프로그래밍에 대해 열렬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국은 베를린 수상작인 <투야의 결혼>과 한줌의 반유토피아적인 저예산 디지털영화로만 대표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우울한 일이에요” 하며 그녀는 말했다. “나는 중국을 산업 파트너로서 진흥하려고 하고 있지만 서양에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중국의 주류영화들조차 볼 수 없으니. 한국에서 선정된 라인업은 더 형편없어요.”

그래서 문화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번역 조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