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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제1세대 시네필 감독의 모든 것

11월6일부터 22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대화>의 서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영화에서 사운드가 사라진다면 과연 어떤 감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트뤼포는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을 이야기했고 그것은 올바른 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오프닝을, 지하철에서의 숨바꼭질을, 엔딩장면의 제프(알랭 들롱)의 자살에 가까운 몸짓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 명단에 이름 하나가 빠져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바로, 장 피에르 멜빌.

장 피에르 멜빌은 제1세대 시네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할리우드 갱스터영화와 필름누아르에 마음을 빼앗긴 시네필이었고, 그 장르의 특징을 흡수하여 자신만의 이미지로 번안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흔히 ‘프렌치누아르’라 불리는 멜빌의 인물들은 그것이 자신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속으로 말없이 걸어가곤 한다. <사무라이>의 제프, <암흑가의 세사람>의 보석털이범, <그림자 군단>의 레지스탕스 등에게서 신화적 영웅의 강렬한 운명성이 엿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한 운명은 과거도 미래도 모두 거세해버리고, 인물을 오직 현재 속에 붙들어맨다. 멜빌의 인물들, 과거에 대한 기억도 미래의 희망도 없는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내던져지거나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사무라이>의 제프가 왜 킬러가 됐는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암흑가의 세사람>에서 코리(알랭 들롱)가 왜 감옥에 갔는지, 얀센(이브 몽탕)이 왜 타락한 경찰이 됐는지에 대해 멜빌은 관심이 없다. 비에 젖은 밤거리를 헤매다 자신의 무덤으로 걸어가는 것이 킬러로서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멜빌은 단지 현재라는 시간 속의 그들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파국적 결말을 그려낸다.

<암흑가의 세사람>

<형사>

멜빌의 영화에 항상 따라붙는 멜랑콜리, 윤리적 모호함, 고독 등의 단어들 역시 자신의 삶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인물들의 특성과 분리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멜빌의 영화적 특성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과 연관이 있을 것이고, 어떠한 면에서는 그가 자신의 역량을 집중시켰던 ‘필름누아르’나 ‘갱스터영화’ 등에 내재된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젊은 시절에 경험해야 했던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잉태된 삶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 2차대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그림자 군단>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멜빌은 많은 영화에서 오프닝 시퀀스에 어떤 격언을 새겨넣곤 했는데, <그림자 군단>에 등장하는 문구는 “나쁜 기억들이여, 어서 오라, 너는 나의 멀어진 청춘이다”다. <암흑가의 세사람>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말하던 형사의 암울한 세계관 역시 “더이상 신성한 것은 없다”(<그림자 군단>의 대사이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전쟁의 ‘나쁜 기억’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장 폴 벨몽도와 알랭 들롱의 스타 이미지가 빛을 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던 멜빌은, 때로는 마초적인 외면(장 폴 벨몽도)으로, 때로는 얼음 조각 같은 내면(알랭 들롱)으로 남성의 로망을 완성시켰지만, 그의 연출력은 마초의 강인함보다는 여성의 섬세함에 빚지고 있다. <암흑가의 세사람>의 얀센에게서 멜빌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주 작은 보안장치를 총으로 겨누던 얀센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용 술병을 꺼내 잠시 망설이다 알코올의 유혹을 뿌리치고 세밀한 손동작으로 표적에 탄두를 정확히 꽂는다. 알코올중독자 얀센은 알코올과 약물로 평생을 버텼지만 섬세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미니멀한 연출력을 보여준 멜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11월6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은 앞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그의 장편 데뷔작이었던 <바다의 침묵>과 장 콕토의 소설을 각색한 <무서운 아이들>, 사운드와 이미지의 활용이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와 함께 할리우드 필름누아르와 멜빌의 프렌치누아르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는지를 적절히 보여주는 <밀고자>, 누벨바그에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멜빌의 영화적 전환점인 <도박꾼 밥>, 그리고 범작에서 머물고 말았지만 <밀고자>에 필적하는 오프닝 시퀀스를 보여주는 그의 유작 <형사>까지 12편의 작품을 상영한다. 멜빌이 남긴 장편영화가 14편임을 감안한다면, 이번 회고전은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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