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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님의 그윽한 말투를 느껴봐

판타지 사극만이 줄 수 있는 만화적인 화법의 묘미,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

MBC 판타지사극 <태왕사신기>는 드라마 사상 가장 다채로운 관점의 평가를 끌어내고 있는 사례일지 모른다. 30%에 근접한 시청률을 꾸준히 올려 히트작의 기준은 통과했지만, 딱 그만큼만 유지하며 ‘누구나 즐기는’ 국민드라마의 화력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이 드라마를 향한 반응의 한 자락을 가늠할 수 있다. 무한의 열광과 철저한 무관심으로 갈리는 마니아 드라마의 증후도 나타내면서 종반부에 진입한 현재까지도 캐스팅, 작품의 노선 등과 관련해 지지와 의구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공격보다 지지하는 입장에서 왜 <태왕사신기>를 보느냐고 묻는다면 개인적으로는 세 남자의 말투 때문이라고 아주 지엽적인 이유를 꺼낼 것 같다. 세 남자란 배용준, 오광록, 최민수다.

애초 할 일과 벌 돈이 더 많은 해외를 염두에 두었다는 탄생 과정을 머리 한쪽에 쟁여두어서인지 이 드라마를 보면 왠지 제일 큰 노다지인 일본을 비롯해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 전파를 탔을 때를 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세 남자의 경우 짓궂은 우월감을 발동하는 구석이 있다. 더빙이나 자막의 도움이 필요한 비한국어권의 시청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재미난 화법을 가졌는지를 만끽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민수는 ‘태왕’ 배용준의 적대세력인 화천회의 대장로 역을 맡고 있지만 ‘기하님, 기하님’을 스멀스멀 내뱉을 때를 제외하면 ‘너, 떨고 있지?’의 공포스러운 긴장감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가끔 감정이입이 과해 좀 징그럽고 웃기기는 해도 멜로디와 박자를 타며 노래하듯 말하고 팔로 추임새의 안무를 곁들이는 일관된 스타일은 제법 집중력을 제조한다.

최민수가 노래를 부른다면 사신 가운데 한명인 ‘현고’ 오광록은 시를 낭송한다. 오광록 특유의 연기화법이야 비단 이번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으로 막힘없이 떽떽거리는 지략가라는 캐릭터의 전형과 다르게 느슨하고 어눌하며 시도 때도 없이 ‘하~’ 하는 한숨의 감탄사를 부연하는 오광록의 서정적인 해체주의 연기는 드라마의 비범함을 돋운다.

가수도 있고, 시인도 있는 이 드라마에는 암수동체의 영웅도 있다. 애당초 테스토스테론을 얼굴 밑에만 집중한 그의 외모에 덕지덕지 붙은 수염과 ‘나를 따르라’의 우렁찬 웅변조는 불협의 요소였을 터. ‘태왕’ 배용준은 청순하고 ‘쿨’한 이완의 말투로 고운 영웅상을 체현하고 있다. 한 장면에서 맞닥뜨린 배용준의 낭창한 말투를 처음 들었을 때 ‘혹시 <태왕사신기>가 퀴어드라마? 라고 귀를 의심했다’는 한 남자연기자의 고백도 무리가 아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다급하게 굴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느껴’, ‘아는데?’ 등 간결하게 태연한 반응을 반사하는 그는 운명적인 영웅의 전지전능함을 여유롭게 드러내는 동시에 펑펑 흐르는 눈물보다 동공의 실핏줄 하나가 더 강렬한 감정효과를 자아내는 절제의 극적 효과를 유도한다. 풍부하게 감정을 싣지 않는 그의 화법은 연기력의 한계를 조율한 결과일 수 있지만 여성에 의해 조립돼온 최신 버전의 이상적인 남성상을 고대의 시점에서도 설득력있게 자기화하고, 작은 행동 하나로 과찬의 열광을 자아낸다는 것도 배용준의 파워라 하겠다.

이들의 나르시시즘적인 연기가 돌출된 혼자 놀기가 아니라 블랙홀이 돼 조화롭게 드라마의 힘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은 어떤 비현실적인 것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는 ‘판타지’라는 놀이터를 만나서일 수도 있다. <태왕사신기>가 주는 즐거움의 많은 지점은 거국적인 기획의도와 무관하게 지극히 만화적이지만 자기 확신과 개성이 강한 인간의 향기를 맡는 것도 가끔은 유쾌한 자극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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