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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날마다 영화제 시대?
2007-11-13

우후죽순 넘쳐나는 영화제들, 행정적 접근 대신 확실한 색깔 찾기 우선돼야

이른바 국제영화제의 시대, 이제 어지간한 국내 대도시의 지명 뒤에 ‘영화제’라는 말만 붙이면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이곳저곳 각기 다른 컨셉과 규모를 지닌 여러 군소영화제들에 이르기까지 지금 한국은 ‘영화제의 천국’이라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다. 거의 100여개에 이르는 이들 영화제는 저마다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관객을 성공적으로 동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들을 향해 지속적인 점검이 필요한 때다.

11월은 영화제의 홍수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았다. 올해로 5회를 맞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SIFF 2007)가 열렸고, 연말까지 열리는 영화제 중 가장 매머드급이라 할 수 있는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도 70%에 가까운 좌석점유율을 보이며 폐막했다. 색다른 컨셉으로 무장한 영화제도 있었다. 일본 핑크영화로 메뉴를 차린 ‘씨너스 핑크영화제’가 첫회를 열었고, 최신 영화를 극장과 TV에서 동시개봉하는 영화제로 주목받은 KBS프리미어영화제도 올해로 어느덧 3회를 맞았다. 이처럼 연중 내내 영화제가 많다보니 일정이 겹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일선 영화 제작자들은 투자 위축을 호소하며 ‘한국영화의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영화제 좀 그만 만들자’며 영화제의 홍수를 걱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 중심의 영화제들, 예산 문제 등으로 위기 맞아

올해 영화제가 많았다고들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이미 2개의 큼지막한 기존 영화제가 빠져 있다. 먼저 8월 개최 예정이었던 고양어린이국제영화제는 올해 초 고양시와의 불협화음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이 영화제는 지난해 영화인회의 부설 한국영상산업정책연구소에서 실시한 국내 국제영화제 평가에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가장 많이 향상된 영화제’로 언급됐기에 그 충격은 컸다. 현재는 컨셉과 기조를 그대로 계승해, 인천시의 예산 지원으로 인천국제어린이영화제(가칭)라는 이름으로 내년 새롭게 출범할 예정이다. 반면 지난해 11월 쇼케이스를 열었던 안산국제넥스트영화제의 경우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제는 지난해 쇼케이스를 통해 의욕적으로 출발함과 동시에 이어 올해 6월 1회 본영화제 개최를 추진해왔지만, 다시 정식 출범을 미루게 됐고 결국 지난해와 같은 쇼케이스를 올해 11월 다시 열 예정이었지만 그마저도 무산됐다. 한 영화제 관계자에 따르면 “영화제 지원사업비 3억원을 편성해 시의회 승인을 받았지만 이후 거듭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며 “국비 마련이 안 된데다 요즘 여러 다른 영화제와의 차별성이 부각되지 못한 점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각 지자체나 구청을 중심으로 영화제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것은, 영화제가 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여러 축제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영화제를 신설하고 지원하는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다. ‘우리 지역에도 부산영화제 같은 영화제를 만들어달라’는 것. 그런 점에서 최근 제주영화제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2000년 제주트멍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영화제는 지난 2005년부터 제주영화제로 명칭을 바꿔 계속돼오고 있다. 지난 6회까지 독립영화의 최근 흐름을 소개하며 당대 영화계의 흐름과 다소 떨어져 있는 제주지역 영상문화의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늘 예산확보가 문제였던 탓에 안정적인 예산지원을 매년 요청해왔지만, 최근 제주영화제 집행위원회가 제주특별자치도에 확인한 결과 2008년 예산안에 ‘제주영화제 개최’ 예산은 누락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도 역시 지자체의 부산을 향한 동경이 빠질 수 없다. 제주영화제 이영윤 사무차장은 “도쪽에서는 제주영화제라는 타이틀을 쓰는 것도 문제삼았다”며 “제주영화제는 독립영화 컨셉이고 그것은 소수, 비주류의 행사인데 바깥에서 보면 부산영화제 뭐 그런 영화제처럼 전체로 인식되는 느낌을 주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1997년에 아태영화제를 제주에서 열었지만 처참하게 망했고, 2005년에도 춘사영화제를 제주에서 여는 등 계속 과시적인 행사를 열 욕심만 하고 있다”며 “부산 같은 장밋빛 전망만 보면서 현실적인 비전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문화보다 지역이 앞선 행정적 접근이 이런 많은 영화제를 낳는 원인이 됐지만, 결국 대부분 실속은 차리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컨셉과 특화, 작은 영화제들의 의미있는 성공

현재 영화진흥위원회에 등록된 영화제는 현재 40여개 정도인데, 몇몇 극장과 단체들이 모여 만든 군소 기획 영화제까지 합하면 추정치는 무려 100여개가 넘는다. 올해 1회를 막 시작한 국제영화제만 해도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과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그리고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를 포함해 3개나 된다. 그외 여전히 많은 다른 영화제들이 생겼지만 경주에서 열린 ‘대한민국 영화연기대상’의 심각한 파행에서 보듯, 예산 지원과 운영 등 주먹구구식 영화제 집행의 문제점은 드러날 대로 드러났고,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계속 생존할 수 있을 만한 영화제의 윤곽은 이제 거의 다 드러난 상태다. 덧붙여 지난해 광주시의 예산 전액 삭감으로 존폐 위기에 내몰렸던 광주국제영화제가 지난해 민간 주도로 6회 대회를 치른 뒤, 올해 다시 민간 주도 기금 마련을 통해 극적으로 오는 29일부터 7회 대회를 무사히 열게 된 것은 ‘영화제의 생존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반면 몇몇 중소 영화제의 성공은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사 진진의 임진희씨는 “영화제가 많아질수록 그에 맞춰 새로운 관객층을 개발하면 된다”고 말한다. 먼저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와 메가박스일본영화제는 각각 단편영화와 일본영화라는 측면에서 다시 한번 안정적인 자리를 확인시켜줬다. 특화라는 측면에서, 현재 재기가 불투명한 안산국제넥스트영화제 역시도 막판에는 SF영화제로의 특화를 꿈꿨다는 사실은 곱씹어볼 만하다. 그런 점에서 올해 처음 시작한 핑크영화제와 3회째를 맞아 변화를 꾀한 KBS프리미어필름페스티벌은 덩치 큰 영화제의 틈새에서 확고한 컨셉을 만들어 예상 관객을 웃도는 의미있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핑크영화제를 기획한 씨너스의 주희 이사는 “남자관객 없는 여자들만의 성인영화제라 우려가 많았지만, 20대 초반 여성관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이후 다른 영화제를 어떤 식으로 기획해야 할지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핑크영화제가 연령 공략에 성공한 경우라면, KBS프리미어필름페스티벌은 다소 애매모호했던 성격을 3회째를 맞아 상영관을 교체함으로써 확고하게 변화를 줘 관객층을 넓힌 경우다. 이를 준비한 이관형 PD는 “오프라인 영화제는 1회 때 단성사, 2회 때 롯데시네마와 함께했다. 그런데 와이드릴리즈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다양성을 보완하는 측면도 있는 영화제다 보니 하이퍼텍 나다가 성격이 맞는 것 같았다. 하이퍼텍 나다가 쌓아온 노하우도 있다보니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하이퍼텍 나다가 그동안 자체 기획전과 감독전을 충실히 꾸려온 곳이라는 점에서 이번 경우는 작은 영화제들간의 바람직한 M&A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올해는 지역명을 내건 지자체의 영화제가 거대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고, 좀더 분화된 다양하고 특색있는 영화제들이 주목받은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여전히 영화제가 많아서 문제라기보다는 구미를 당길 만한 그 색깔과 컨셉이 관건일 것이다.

“컨셉이 있어야 산다”

영화제 관계자들이 말하는 생존전략

“지난 10여년 동안 영화제가 많이 생겨나고 이에 대한 인식도 변했다. 인프라와 인력도 좋아졌다. 충분히 많은 영화제를 가동할 수 있는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차별화다. 그리고 영화제가 많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객을 극장으로 오게 하면 된다.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는 충무로가 상징하는 한국영화의 전통을 되찾고 주옥같은 한국 고전영화를 소개하려 애썼다. 이를 통해 극장이나 영화제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을 불러모으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1회 영화제로서 기존의 관객층에 의존하기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새로운 관객층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김홍준 집행위원장

“내부적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워낙 많은 영화제들이 있어서 걱정이 컸는데 아예 신경쓰지 않는 방향으로 갔다. ‘온리 여성관객’이라는 점에서 비판도 듣긴 했지만 타깃 설정 측면에서는 성공한 것 같다. 20대 초반의 여성관객이 많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핑크영화제 주희 프로그래머

“영화제에 가면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영화제는 오프라인 상영관에서 놓친 영화라도, 최근 <토요명화>를 폐지하고 신설된 <KBS 프리미어>를 통해 볼 수 있다. 매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웃음) 더불어 내년 2월에는 전국의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순회 상영할 계획도 있다.” -KBS프리미어필름페스티벌 이관형 PD

“안정적인 예산을 확보할 자신이 없다면 각 지자체들은 영화제를 급조할 생각을 해선 안 된다. 특히 제주도는 교통문제로 게스트 초청 등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더한 비용이 들어간다. 또한 기본적으로 국제영화제라 하더라도 각 지자체에 기반한 영화제는 그 지역 영상인력과 단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이른바 지역마다 ‘영상메카’를 부르짖는 마당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공동의 비전을 키워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서 전시적인 규모에만 급급하는 것은 무조건 실패할 것이다.” -제주영화제 이영윤 사무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