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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다이어] 구겨진 청바지가 어울리는 남자
장미 2007-11-15

<세브란스>의 대니 다이어

<세브란스>는 이상한 영화다. 끔찍한 장면에서 음흉하게 유머의 화살을 날리는 이 작품은 관객을 질겁하게 만들다가 웃기고, 배꼽을 쥐고 뒹굴다가 또 깜짝 놀라게 만든다.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뭔가 이상하다. 무기회사 팔리세이드의 영국 지사에서 일하다 헝가리로 워크숍을 떠난 이들은 부하직원이 “Fuck me now, Fuck me hard!”라고 외치는 황당무계한 꿈을 꾸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정체불명의 파이를 누군가의 선물이라고 여기거나, 악당들을 새 무기로 혼내주겠다고 장담하다가 애꿎은 비행기를 박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인물은 스티브다. 환각 버섯을 아무렇지 않게 씹어 먹는가 하면 글래머 간호사가 등장하는 섹시한 백일몽을 서슴없이 읊조리는 이 남자는 마약과 섹스에 환장한, 혹은 도통 이를 숨기려들지 않는 문제적 인간이다. 심지어 악한들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장엄한 음악을 배경으로 동료에게 건네는 말이, “넷이서 할까?”(foursome)다. 심리치료가 절실히 필요할 것 같은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한 이는 대니 다이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배우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977년 이스트런던에서 태어난 다이어는 기실 영국 젊은이의 표상에 가장 가까울 법한 인물이다. 매너있게 여성을 에스코트하거나 완벽하게 재단된 슈트를 차려입은 휴 그랜트나 콜린 퍼스, 주드 로 같은 신사가 아니라 때론 마약이나 술에 취해 펍에서 횡포를 부리는 보통 영국 남자 말이다. 다이어가 즐겨 연기한 캐릭터도, 구겨진 청바지에 티셔츠가 어울리고 축구경기에 반쯤 미쳐서 고함을 지르는 그런 인물들이다. 실제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열혈 팬이라는 그는 이상할 만큼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 특히 폭력적이기로 악명 높은 첼시 팬들을 그린 <풋볼 팩토리>(2004)는 그에게 가장 큰 유명세를 안긴 작품. 섹스와 마약, 맥주, 그리고 첼시의 승리만이 삶의 낙인 토미 존슨 역을 맡아 단순하고 잔인한 훌리건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들만의 월드컵>(2001)에선 진지하게 축구팀에 합류하고 싶어하지만 약간 모자란 탓에 언제나 놀림을 받는 빌리를 연기했는데 “충분히 웃기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캐스팅하지 않으려 했다는 <세브란스>의 투자자들에게 단체 관람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발군의 코미디 연기력을 선보인다. 게다가 예사롭지 않은 출연작에 힘입어 훌리건을 다룬 TV쇼 <리얼 풋볼 팩토리즈>를 진행하기도 했으니, 소심하고 건조하지만 유머러스하고 축구와 관련해 가끔 이상한 열정을 발휘하기도 하는 영국인들이 그에게 애정을 보내는 이유도 얼핏 짐작이 간다.

인터뷰 중 “fucking”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만큼 솔직한(?) 심성의 소유자지만 그는 “터프가이 다이어, 나는 그 말이 정말 싫다”고 토로한다. “나는 면밀한 사람이다. 이스트런던 출신이고 노골적으로 말할 뿐이다.” 학창 시절 만난 여자친구와 10년이 넘도록 함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주위의 선입견이 싫을 만하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10살 난 첫째딸을 끔찍이도 사랑해 아이의 이름을 팔에 문신으로 새겼다는 이 가정적인 남자는 한편으로 꽤 오랜 암흑기를 견뎌낸 끈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4살 때 주말 드라마 학교를 다니다가 에어전트의 눈에 띈 그는 헬렌 미렌 주연의 TV시리즈 <프라임 서스펙트3>(1993)에 캐스팅돼 처음 연기자의 세계를 맛본다. “첫신에서 데이비드 튤리스와 함께 연기했다. 나는 엄청난 배우들과 함께 있었고 1500파운드를 받았다. 연기야말로 내 삶이라고 생각했다.” 대니 다이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까지는, 그러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Thief Takers>(1996), <Soldier Soldier>(1997) 등의 TV시리즈에 간간이 얼굴을 비추던 그는 파티, 마약, 섹스에 절어 사는 청춘 이야기인 <휴먼 트래픽>(1999), 닉 러브 감독의 연출작들인 <굿바이 찰리 브라이트>(2001), <풋볼 팩토리>(2004), <비지니스>(2005) 등에 출연하면서 점차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한다.

<세브란스>로 할리우드의 시선마저 빼앗은 다이어는 현재 TV시리즈 <Blood Rush>와 스릴러물 <7 Lives>를 동시에 찍고 있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만도, 연출작마다 그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닉 러브 감독의 <아웃로>, 질리언 앤더슨과의 호흡으로 눈길을 끈 <스트레이트헤드>, 로맨틱코미디물인 <올 투게더>, 모두 3편이다. 게다가 그 사이 코미디물 <시티 랫>의 촬영까지 마쳤다니 이 정도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임이 틀림없다. “나는 내가 누군지에 대한 환상이 없다. 그저 이스트런던 출신의 농부일 뿐.” 이제 대니 다이어는 할리우드에서 주목하는 영국 배우로까지 극상한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고 있을까. 그러나 사탕발림에 흔들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견지하는 한, 조각 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호감을 사는 이 수더분한 영국 남자는 오래도록 우리를 낄낄거리면서 웃게 만들거나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꾀할지 조심스레 예측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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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R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