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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술 마시고 남자한테 굳이 전화를 해야겠다면…

찌질한 여자 캐릭터 외엔 공감할 게 전혀 없는 <어깨너머의 연인>

철이 들면서 몇 가지 결심을 했었다. 꽤 많은 결심을 했던 것 같지만 기억나는 것은 이것저것 말고 하나만 하는 일관성있는 인간이 되겠다는 것과 유부남은 건드리지 않겠다, 술 마시고 취해서 옛날 애인에게 전화하지 않겠다, 이 세 가지 정도뿐이다. 가끔 휘청거리긴 하지만 일관성 면에서는 그럭저럭 본전치기는 한 것 같고 유부남 문제는, 필사의 각오로 건드리지 않았다기보다는 건드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유부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 나의 의지보다는 저도 모르게 나에게서 자신을 지키고 만 그들의 공이 컸다. <어깨너머의 연인>에서 수완(이미연)이 건드린 유부남만큼 섹시하고 단단한 몸매를 지닌 유능하며 부유한 유부남이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면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다 해도 별일 없었을 것이다. 원래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강제로 자제를 당하게 되는 법망이란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결의 중 3분의 2를 지켰으니 나는 결심을 잘 지키는 인간이라며 우쭐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맨 마지막 항목을 전혀 지키지 못했다.

<어깨너머의 연인>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단 한 장면은, 헤어지기로 결심했던 수완이 술에 취하자 계단으로 가서 그 남자에게 전화하는 모습이었다. 그외에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요만큼도 없는 여자들이었다. 섹스 한번 한 게 뭐 그렇게 뿌듯하고 장한 짓인 것처럼 감격에 감격을 해대는 첫 장면부터 불편했지만 그러한 불편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희수(이태란)는 친구에게 유부남과 놀아나라며 권장하다가 자기 남편이 어린 여자애와 바람을 피우자 그동안 잠자리도 갖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매력 없던 남편이 밖에서는 먹어주는가 싶어 오랜만에 선심 쓰는 섹스를 하고, 명품 백을 얻어 가진다. 얼핏 쿨하게 처신하던 그녀는 남편의 정부가 나타나 당신 남편이 나를 따라다닌 것뿐이라고 말하자 비로소 사자처럼 분노한다. 이 분노는 다소 당혹스러운데, 그것은 희수의 화가 남편이 혼인 관계에 속해 있는 정조를 훼손했기 때문에 느끼는 아내로서의 상식적인 분노가 아니라 내 물건을 누가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을 때의 분노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수완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별로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친구 남편이 어린애와 바람이 난 걸 알면서도 떡하니 유부남과 바람피우고 들어와 그걸 보고 떽떽거리는 친구에게 한치도 지지 않고 같이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별로 눈치가 없는 여자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여자들에게는 꽤나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촌스럽고 찌질스럽다는 일관성. 그것은 아주 친근감 가는 일관성이었다. 나도 그런 면에서는 아주 일관성있는 여자니까.

술에 취해 옛 애인에게 전화하는 나는, 그 면에서 최고의 일관성을 자랑한다. 그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촌스럽고 찌질스럽다. 더군다나 나는 수완처럼 만나서 섹스할 용기도 없기 때문에 몇배로 찌질스럽다. 그런 관계는 지나고 나면 더욱 민망하고 마음 아프고, 뒤처리에도 몇배의 힘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번호를 고르는 데 아주 신중하다. 조금이라도 아직 나를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절대로 전화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한계선이다.

사실 가장 한심스러운 것은 알코올이 주는 저급한 위안이다. 어쩔 수 없이 얄팍하고 천박한 인간인 자신의 거칠고 흉한 맨 얼굴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끔 만드는 숙명적인 숙취는 그 싸구려 위안을 누린 대가로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값이다. 술에 취해서 굳이 전화를 하고 싶다면 내 전화를 받아주지 않을 만큼 나를 미워하는 남자에게만 전화를 건다, 그러면 혹시나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계속해서 수화기를 들고 있을 수 있다. 굳이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면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남자에게만 전화를 건다. 나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옛 남자와의 대화는, 타고 남은 숯처럼 약간의 온기는 있지만 한줌의 여지도 없이 다 타버렸기 때문에 다시 불붙을 염려가 전혀 없다. 마냥 비겁하게 약간 남아 있는 온기를 누릴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영화의 교훈은 술을 안 마시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수완은 주로 와인을 마시거나 소주를 마셨을 때 유부남과 사고를 친다. 술을 안 마시면, 유부남을 건드릴 위험이나 옛 애인에게 울면서 전화할 위험이 몰라보게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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