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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미술비평가들

문학비평이 문학작품에 값을 매기듯, 미술비평은 미술작품에 값을 매긴다. 그러나 이 두 ‘값’의 값이 똑같지는 않다. 문학작품에 비평이 매기는 값은 그 일부분만 화폐로 바뀐다. 다시 말해 그 값의 상징 차원과 물질 차원은 어긋날 수 있고, 실제로 흔히 어긋난다. 반면에, 미술작품에 비평이 매기는 값은 거의 고스란히 화폐로 바뀐다. 다시 말해 그 값의 상징 차원과 물질 차원은 곱다시 포개진다.

문학비평가들이 한목소리로 상찬한다 해서 어떤 소설책의 정가가 오르는 일은 없다. 물론 소설은 인쇄라는 복제기술에 공급을 의존하므로, 비평가들의 언어는 드물지 않게 소설책의 판매량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그 영향은 결정적이지 않다. 비평가들의 일치된 상찬 속에서도 팔려나가지 않는 소설책이 적지 않듯, 비평가들의 일치된 무시나 혹평 속에서도 기세 좋게 팔려나가는 소설책이 적지 않다. 문학소비자가 문학비평가에게 제 소비행태를 의존하는 정도는 그만그만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문학작품의 공인된 미적 가치와 그 작품을 통해 작가나 출판사가 벌어들이는 경제적 이득은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문학작품의 상징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이렇게 어긋나게 되는 것은 인쇄라는 복제기술 때문이다. 원품과 상징적 값이 거의 다르지 않은(사실은 원품이 아예 없는) 복제품 하나하나의 물질적 값이 그리 비싸지 않으므로, 소비자는 비평가라는 조언자를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다. 다른 복제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문학에서처럼 음악이나 영화에서도, 소비자는 비평가에게 부분적으로만 의존한다. 그들은, 비평가가 뭐라 말하든, 이 작품은 여기가 좋고 저기가 모자라다고 제 나름의 평가를 내리고 그 평가를 제 소비에 반영한다. 그래서 음악비평가나 영화비평가가 어떤 작품에 매긴 값은 부분적으로만 화폐로 바뀐다.

흔히 미술이라 부르는 조형예술, 특히 회화는 사정이 다르다. 회화는 복제가 불가능한 예술이다. 아니, 복제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복제품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예술이다. 상투어를 쓰자면, 회화는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는 예술이다. 이 아우라는 물질 자체가 상징이라는 조형예술의 특징에서 온다. 물론 인쇄술이나 녹취술 같은 복제기술이 나오기 전엔 문학(책)이나 음악(연주)에도 아우라가 있었다. 또 컴퓨터그래픽이 나온 뒤엔 회화의 아우라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이 시대 예술의 주류 형태에만 눈길을 건네기로 하자. 그 주류 형태 안에서, 회화는 아우라를 간직한 거의 유일한 예술이다.

거기에 더해, 회화는 다른 장르에 견줘 그 좋고 나쁨을 가려내기가 사뭇 까다로운 예술이다. 까다롭다는 것은 그 기준이 섬세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기준이 들쭉날쭉하고 물렁물렁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표현주의 이후의 ‘난해한’ 그림들에만이 아니라 전통적 구상화에도 해당한다. 이런 기준의 상대적 물렁물렁함은 오히려 미술비평가의 권위를 다른 장르 비평가보다 크게 만든다. 다른 장르의 경우 그 기준의 대강은 비평가의 마음 밖에 있으나, 회화의 경우엔, 기준이 워낙 물렁물렁하므로, 비평가는 그 기준을 쉽사리 제 마음 안에다 세우거나 과격하게 구부러뜨린다.

기준의 물렁물렁함은, 회화 장르가 지닌 아우라와 결합해, 미술비평 언어의 환금성을 대책없이 키운다. 유력한 문학비평가를 친구로 두고 있는 소설가가 돈을 벌 확률보다 유력한 미술비평가를 친구로 두고 있는 화가가 돈을 벌 확률이 훨씬 높다. 문학이나 다른 복제예술에선 비평의 값 매김 행위가 중층적이지만, 회화에서는 날것으로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미술비평의 감정행위는 KBS가 일요일마다 내보내는 <TV쇼 진품명품>의 감정행위와 한치도 다름없다. 화상과 미술비평가의 공모가 출판자본가와 문학비평가의 공모보다 훨씬 더 흔하고 악질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당연히, 쓰레기의 축성(祝聖)은 문단을 포함한 다른 예술계에서보다 화단에서 더 흔하다.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이런 ‘사기극’에 대한 분개와 조롱이다. 미술비평이, 한국의 미술비평만이 아니라 미술비평 일반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사로 덧칠돼 있는 데는 이런 사정도 개입했을 테다. 최근의 박수근, 이중섭 그림의 위작 소동 역시 이 맥락 속에 있을 것이다. 중학생의 그림도 ‘대가’의 서명과 비평가의 ‘보증’으로 ‘걸작’이 되는 것이다.

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그림의 역사적 가치에 합의하기는 너무 쉽지만, 그 그림들의 미적 가치에 합의하기는 너무 어려워 보인다. 그 ‘미적’ 가치가 ‘테크닉’을 넘어 ‘철학’까지 포함할 땐 더욱 그렇다. 그린 지 한 세기도 안 된 그림이 경매장에서 수십억대를 호가하는 것은 제 비평언어가 곧 ‘감정가’가 되는 회화 장르의 취약성을 미술비평가들이 즐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의 ‘거장’들 앞에서 심각해지는 관람객이 딱하게 보일 때가 있다. 볼 눈만 있다면, 그는 미술관 바깥의 거리와 삶 속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