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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흥미로웠을 테지만, <왕과 나>

EBS 1월13일(일) 오후 2시20분

율 브린너와 데보라 카가 주연한 뮤지컬영화 <왕과 나>(1956)는 이십세기 폭스사가 제작하여 큰 인기를 끈 이래 8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되었고 몇해 전에는 주윤발과 조디 포스터 주연의 <애나 앤드 킹>으로 리메이크되었다. 근 50년에 걸쳐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원본인 <왕과 나>는 타 문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타 문화에 대한 호기심, 서구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이국적 스펙터클에 기댄 영화다.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서구 여성이 봉건적이고 폭압적인 동양의 왕과 그가 지배하는 전근대적인 왕실을 점차 계몽해간다는 설정은 당대 서구 관객에게는 몰라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똑똑한 서구 여성과 한 남자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동양 여성들의 무리, 서구의 과학적 사고를 동경하면서도 뼛속에 뿌리박힌 전근대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왕의 대립된 이미지, 행동, 언어는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올바름의 문제를 떠나 영화는 뮤지컬로도, 드라마로도 극적인 재미의 순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산만하고 허술한 구석이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린 시절 본 이 영화를 동양의 왕과 서구 여성의 절절한 로맨스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그랬다면, 적어도 오락적인 차원에서는 훨씬 긴장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인상적인 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개작하여 주인과 노예의 일방적인 관계를 비판하는 영화 속 연극장면이다. 타이 고유의 춤과 음악으로 재창조된 연극은 영화 속 전근대적인 왕실을 빗댄 이야기이자, 동양 봉건제에 대한 서구식 자유주의의 계몽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극장면은 이 영화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주는데, 지극히 보수적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왕실 안에 끌고 들어오는 설정 자체가 영화의 색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뭐, 50년 전에 만들어진 아카데미 5관왕에 빛나는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이런 식으로 새삼 오리엔탈리즘 운운하는 게 우스워 보일지 모르겠으나 2008년 새해, 다시 본 <왕과 나>에는 그런 뻔한 비판 이외에 그만큼 할 이야기가 없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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