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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후면비사] 박동명 X파일 파문
이영진 2008-02-21

1975년 9월 여배우 13명 제명 조치 부른 ‘한국판 돈환’ 박동명 사건

1975년의 여름은 암울했고, 흉흉했으며, 또 끔찍했다. “3개월된 갓난아이부터 70살 노인에 이르기까지” 잇따라 17명을 살해한 김대두 사건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남산 위에서 내려다봐도 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는 스물여섯 청년은 세상을 향해 ‘재크나이프’를 마구 휘둘렀다. “한탕해서 멋지게 살고 싶었다”는 살인마 김대두는 전국을 돌며 피를 뿌렸고, 그 대가로 고작 “현금 2만6천원과 여자손목시계 1개, 고추 30근, 쌀 한말, 플래시 1개, 불루진 바지 1벌, 그리고 가짜 금반지 1개”를 손에 넣었다. “사흘마다 한번씩 살인을 저질렀으니” 사형을 언도받았어도 동정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대두 사건의 여파는 ‘한국판 돈환’ 박동명에 대한 세상의 비난보다는 작았다. 태광실업 대표 박동명은 시온그룹을 이끌던 거부 아버지를 둔 대표적인 재벌 2세. 애초 대검 특별수사가 문제삼았던 혐의는 위장 이민과 불법재산 해외 유출건이었다. 서민들조차 이민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정도에서 끝났으면 박동명 사건의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을 리 없다. 박의 자택인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고급 맨션을 급습했던 수사관들조차 자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형 스캔들을 점화했음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배우 강모양과 동침하다.” 수사관들에게 구속됐던 박동명의 집에서는 “여자용 핸드백, 목걸이, 반지, 팔찌 등” 200여점의 사치 귀중품이 나왔다. 벤츠를 몰고 다니며 사치품을 화대로 뿌렸던 장안의 ‘7공자’ 박동명은 하루아침에 희대의 방탕아가 됐다. 수사 과정에서 박은 마담 뚜를 통해 소개받은 국내 영화배우, 탤런트 100여명과 놀아났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해외 원정 유흥에까지 나섰음이 드러났다. 일본의 환락가를 전전했으며, 플레이보이 클럽을 드나들며 바니걸들에게 수천달러의 화대를 지불했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박동명 스캔들은 X파일이 흘러나오면서 더욱 불붙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른바 ‘명단녀’(名單女)를 지목했다. 박동명에 대한 세간의 분노는 그와 잠자리를 함께한 배우들이 누구일까 하는 색녀사냥의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충무로도 여론의 질타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는 1975년 9월에 윤OO씨 등 여배우 13인을 제명 조치한다. “영화계의 부조리를 일소하겠다”는 목적으로 특별조사위원회까지 구성하는 등 부산을 떨었던 영협은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거나 비밀 요정에 출입한 여배우들을 내사했고, 급기야 관련 배우들에게 퇴출을 명한다.

강도 높은 처방을 내놓았으나 잡음은 외려 배가 됐다. 영협이 여배우들을 제명하면서 모호한 이유를 내세운 것도 이유였다. 당시 13인의 여배우에게 내려진 처벌 사유는 ‘비협조자’, ‘행방불명자’, ‘자진사퇴자’. <금병매> <춘희> 등 한국영화에 버젓이 출연 중이던 여배우들이 갑자기 사회적인 반동분자로 몰렸고,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가 됐으며, 원치 않는 은퇴 선언을 한 셈이 됐다. 영화계 전체가 손가락질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영협은 갱생을 위한 희생양을 선택했지만, 결국 거센 항의만 불러일으켰고, 한 여배우는 심지어 음독자살 시도까지 벌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박동명 스캔들로 빚어진 인기 여배우들의 집단 퇴출은 뜻밖의 상황을 낳기도 했다. 1975년 12월호 <영화잡지>는 “최근까지 한국영화의 반수 이상을 만들어내던” 그녀들의 퇴출로 인해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던 영화계가 더욱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하면서도, 외려 제작사들이 이번 기회를 발판삼아 “TV 탤런트들을 대거 영화에 진출시키고 신인배우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있다”고 썼다. 정윤희와 임예진이라는 대형 신인 발굴이 이뤄진 것도 김자옥, 김애경, 박원숙 등 TV 스타들이 스크린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돌을 던지면 맞겠어요.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밀고.” 여배우 퇴출이라는 충무로의 긴급조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안중에도 없던 시절에, 윤리적 단죄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어이없는 해프닝이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실은 충무로의 불황 탈출을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이었다고 말이다.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던 충무로로서는 한때 경원시했으나 버젓이 안방극장의 주인이 된 스타들을 긴급 스카우트할 명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성시대’를 되찾기 위해 충무로는 새로운 ‘영자’가 필요했고, TV에서 건너온 여배우들은 <영자의 전성시대>(1975) 이후 범람한 호스티스물의 주역이 되었다.

참조 <합동연감> <영화잡지> <스물한 통의 역사 진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