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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미국영화엔 피가 마르지 않아

폭력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어 윌 비 블러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본 뒤 다른 영화에 대해 쓰기 어렵다. 3월6일이 개봉이니 아직 객잔에 들어올 때가 되지 않은 영화이나, 내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압도하는 작품이라 순서를 바꾸어 쓴다. 정성일 평론가의 ‘할리우드영화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유 훈련법(저자는 유격훈련, <씨네21> 640호)’, 허문영 평론가의 ‘스필버그의 분신술’(<씨네21> 633호) 그리고 정한석 기자의 <아메리칸 갱스터>의 화법(<씨네21> 635호)에 이어 이 글은 최근 미국영화의 걷잡을 수 없이 수상한 기후에 대한 보고서다.

배경을 밝히자면 이 글은 듀크대학이 있는 미국 더램에서 쓰고 있다. 8주간 강의를 하러 왔는데 내가 머물고 있는 곳, 이웃에는 15개의 스크린이 있는 윈송 멀티플렉스가 있다. 15개관 어디에 들어가건 커다란 팝콘 박스를 든 한쌍의 관객과 내가 주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극장 관객점유율 1∼2% 범위에 내가 있는 셈이다. 다이앤 레인 때문에 본 스릴러 <추적불가>(Untraceable) 때는 한쌍이 아니라 한 남자가 뒤에 앉아서 팝콘을 먹고 있는데 스릴을 넘어 공포였다. 나는 극장에서 돌발 사고가 일어나는 영화들을 생각지 않으려고 애썼다(참고로 듀크대학의 캠퍼스 가까이 총격사고가 일어나서 박사과정에 있던 학생이 죽었다).

악마의 화신으로 분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경이로운 연기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예고편이나 평을 읽는다면 언뜻 고전 성공-실패담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 <갱스 오브 뉴욕>(2002) 등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주연인데다 그가 자수성가하는 석유 왕의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고전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유튜브인 줄 알고 있는(정성일) <클로버필드>나 미국의 영웅/반영웅담을 연설하고 있는 <아메리칸 갱스터>. 스필버그의 디지털-아날로그의 조합과 변주, 이를테면 유튜브와 매끄러운 화술과 변신이 특장인 미국영화의 세계에서 이 영화는 통각, 예컨대 피부와 몸 안을 아프게 자극한다. 육체적 고통이 살아돌아온 영화인 것이다. <부기맨>과 <매그놀리아>의 폴 토머스 앤더슨의 작품이고 아메리칸 리얼리즘 작가라고 불리는 업튼 싱클레어의 <오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처음 15분간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은 채굴장면에서 관객은 그와 함께 갱도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뉴멕시코의 지글지글 타는 듯한 뜨거운 열기도 그대로 느껴진다. 대니얼 플레인뷰는 결국 광석에서 은을 캐다가 다리를 다치는데 최근에 그렇게 절절하게 통증이 전달되는 영화도 드물었던 것 같다. 예컨대 <펄프 픽션> 이후 대부분의 과잉 폭력은 캐리커처화되었고 폭력을 당한 사람이 느끼는 통증 대신 영화는 절단되고 훼손되고 파편화된 신체 부위를 있는 그대로 던져서 보여주는 편이다. 게다가 플레인뷰는 이후 다친 다리를 내내 절기 때문에 그 통증은 지속, 상존하는 영화적 통각으로 관객을 따라다닌다. 자니 그린우드가 음악을 맡았는데 뉴멕시코의 황막한 사막 위로 사이렌 소리를 불길하게 흘리곤 한다. 상식적이면서도 부조화연하는 경향을 보인다. 괜찮은 음향효과다.

이렇게 초반 15분간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플레인뷰의 육체적 고통에 동참하게 한 뒤 곧 그의 태연한 거짓말, 사기극에 말려들게 한다. 먼저 그의 자기소개다. 광산에 고아로 남겨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속이고, 플레인뷰은 자신이 가족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선전하고 다니면서 사회적 신뢰를 얻는다. 그에게 행운의 반전을 가져다주는 유전의 발견도 비밀리에 얻은 아들 H. W. 플레인뷰의 존재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플레인뷰가 갱도에서 다리를 다친 것과 유사하게 아들 H. W.도 유전이 발견되고 폭발이 일어나면서 사고를 당해 청력을 잃는다. 한편 이 유전이 발견된 땅 주인의 쌍둥이 아들인 일라이 선데이(폴 다노)는 엑소시즘을 통해 교인을 사로잡는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플레인뷰에게 교회에 성금을 내라고 유도한다. 플레인뷰는 그런 선데이에게 심한 모욕을 가한다. 이 염치없고 무자비한 자본가와 엑소시스트 선교사의 암투는 영화의 주요 적대로 자리잡는다.

플레인뷰에게 이복동생이라고 주장하는 헨리라는 남자가 등장하고, 플레인뷰는 헨리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핵심은 인간이 싫고, 경쟁자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사업가로 성공할수록 플레인뷰는 알코올에 빠져들고 아들을 증오한다. 영화의 뒤로 가면 플레인뷰과 선데이 사이에 한판 대결이 벌어지는데, 제목 ‘피를 부르리라’가 제값을 하는 순간이다. <There Will Be Blood>라는 영화제목의 폰트는 드라큘라나 뱀파이어 영화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서체인데 선데이도 플레인뷰도 사람들의 정신과 노동을 흡혈하고 착취하는 드라큘라다.

영화 도입부의 통각이 폐부에 사무쳤다면 마지막 대사 “I am finished!”는 성서적 인용이면서 존재론적 패망과 승리를 동시에 가리키는 절절한 대사다. 나는 이 대사를 마지막으로 영화가 휙 끝나버려 극장을 나오면서 몸이 약간 휘청하는 느낌까지 받았으나, 곧 웃었다. 정말 통렬한 영화였다. 기독교와 자본주의를 경쟁시켜 둘 중 어느 것이 더 악한지를 절치부심 경주케 하다가 막상막하로 서로를 ‘끝장’내게 하는 영화다. 한창때면 이것을 기독교 자본주의의 ‘내파’라고 부르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시작해 미 서부의 석유 재벌의 탄생과 그 자본을 필요로 하는 기독교간의 사납고 맹신적 탐욕을 한 방울의 동정도 없이 그려나간 것이다. 잡지 <롤링스톤스>에선 이 영화를 <시민 케인>에 비교하기도 한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기를 현장에서 도저히 이기지 못해 배우가 촬영 도중 한번 갈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일라이와 폴 선데이, 두 역을 맡게 된 폴 다노의 연기는 그가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을 준다. 그야말로 악마가 자본가로 환생한 듯하다. 플레인뷰 역을 맡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정말 경이롭게 그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좀 덜 급진적으로 느껴진다. 하비에르 바르뎀(안톤 쉬거)조차 연기 면에서는 악마의 가면을 쓴 것으로 느껴지지 대니얼 데이 루이스처럼 악마의 화신으로 비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미 서부의 어떤 광포, 광기, 노다지를 환유하게 된 사막 혹은 준 사막 풍경에 매혹되어 있다. 시체가 뒹굴거나 석유가 솟아오르거나, 거기에는 피를 부르는 탐욕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19세기 말의 미국의 지옥화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980년대가 배경인 지옥도다. 이 사막의 지옥은 한편으로는 당연히 미국의 서부지만 여기에 중첩되는 것은 ‘데저트 스톰’의 아프가니스탄의 피의 사막, 석유의 사막이다.

아날로그 추적장치만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부르는 코언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촬영과 연기, 긴장감 그리고 풍경을 포착하는 솜씨 등은 코언 형제의 작품답게 정말 탁월하지만, 이 영화에서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은 로테크가 자아내는 긴장이었다. 예컨대 모스(조시 브롤린)가 240만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모텔과 모텔을 전전할 때 살인청부업자 안톤 쉬거가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는 것을 보고 모스 못지않게 나도 궁금해하던 차에 지폐 사이에 숨겨진 추적기를 보고 그 내막을 알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에서 기막힌 발각과 추적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부지기수이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리처드 도너 감독의 <컨스피러시>(1997)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사자마자 그 정보를 입수한 특공대가 맨해튼 상공에서 그 책방으로 낙하하는 것을 보고 “우와!” 하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는 그 감시의 기술공학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러한 하이테크 감시 기술의 업그레이드 경쟁체제에서 80년대의 추적장치에 그러한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텍사스의 누추한 모텔 방 밖으로 쉬거가 발신장치를 찾아 도착할 때, 모텔의 사인과 차들이 보이고 모스의 돈가방에 동일시하게 된 ‘우리’가 곧 벌어질 피바다를 근심하게 되는 것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미국사회에 대해 무정부적 내파라고 한다면, <마이클 클레이튼>은 자기모멸을 통한 자기 갱신, 일종의 ‘REHAB’ 사회 복귀 훈련 치료라고 볼 수 있는데 변호사가 자신의 역할을 ‘청소부’로 정의하면서 부자들과 부패한 기업의 해결사 노릇을 하다가, 시민의 편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마지막에 마이클 클레이튼(조지 클루니)이 자신을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많지 않은 돈으로 자신을 매수할 수 있었는데 왜 살해 기도를 하느냐?”는 항의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님이 밝혀지지만 이러한 수사법이 자신의 진실을 전달하는 화술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기업의 문제라고 영화는 소리 질러 고발한다.

힐러리 클린턴과 배럭 오바마가 유례없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돌입해 있는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의 극장에서 미국영화의 난데없는 선전을 보고 있다. 미국이 아직도 세계 강대국이니 여기 정치 상황이 진보적으로 변해야 세상이 편할 텐데… 라는 마음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과 코언 형제의 분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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