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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예술의 접목, 그 즐거운 사색의 세계 <이안 다벤포트전>
김유진 2008-03-14

현대미술을 형성시키는 최소한의 조건은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자율적 의지와 예술가를 대중, 비평가, 컬렉터와 연결시키는 미술제도, 이 모순된 두 가지의 긴장관계에서 온다. 세계대전을 치른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이 일상으로 들어오길 원했고, 뒤샹은 변기 오브제 하나로 예술의 권위와 제도를 전복시키려고 했으며, 워홀도 ‘팩토리’에서 ‘팝’(pop)한 작업을 ‘생산’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도들은 아이러니하게 예술의 신화를 더욱 굳건히 했다. 현대미술이 개념적일 수밖에 없는 요인을 일정 부분 제공한 셈이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끊임없이 제도뿐만 아니라, 예술의 신화와 기존의 미술 전통까지 차례차례 뒤집어버렸다.

1988년 여름, 영국의 한 공장에서 열린 <Freeze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시는 절단된 동물 신체나 혈액 등 쇼킹한 이미지를 필두로 전통적인 회화, 조각재료에서 탈피한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기존의 미술 질서를 전복시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현재 생존하는 작가 중 작품 최고 거래가를 기록하고 있는 데미안 허스트가 기획했던 전시는 참여 작가들에게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이름을 안김으로써 현대 미술계의 새로운 작가군의 탄생을 알렸다. 이중 1991년 권위있는 영국 현대미술상인 터너상 최연소 후보로 이름을 알린 이안 다벤포트는 기존의 회화적 표현을 거부하고 새로운 기법을 통해 개념적인 회화작업을 하는 작가다. 산뜻하고 미니멀하게만 보이는 그의 거대한 작업들은 언뜻 보기에 반복적인 수직선의 조합이거나 세련된 색상으로 조합된 간결하고 예쁜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색상과 표현만 남겨놓았다고 그의 작품을 미니멀리즘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재료부터 다르다. 그는 전통적인 캔버스 대신 알루미늄판이나 파이버보드를 회화의 매체로 택해 붓 대신 못, 주사기, 물통 등을 활용하여, 물감 대신 가정용 광택페인트로 작업한다. 이는 일상적이며 단순한 도구들이 표현하는 복잡한 결과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그의 작업관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재료들은 좀더 다양한 표현 기법을 탄생시킨다. 선풍기를 활용한 팬 회화(Fan Painting), 페인트에 적시는 담그는 회화(Dip Painting) 외에 이번에 전시된 17점의 작품만 봐도 그렇다. 연속적인 직선의 그림인 <Poured Lines> 시리즈는 주사기를 이용해 다채로운 색채의 페인트를 세로로 흘려서 만들었고, <Poured Painting> 시리즈 역시 시간차를 두고 두 가지 색의 페인트를 붓는(Pouring) 작업을 하면서 큰 프레임 안에 아치형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팬케이크를 굽다가 작업 방법을 떠올렸다는 <Circle Paintng> 시리즈는 파이버보드 위에 페인트를 떨어뜨려 동그랗게 퍼지길 기다렸다가 적당한 시점에 축에 연결된 파이버보드를 뒤집어 물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도해 얻어낸 작품이다. 작품 과정을 듣고 나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력, 의도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시간 개념, 작가의 계획성과 소재의 우연성이 빚어낸 절묘함이 읽힌다. 관객에게 해석을 강요하는 듯한 개념 미술은 고통스럽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깃든 형식과 기법의 실험은 이렇듯 사색을 수반하기에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