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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미국적인 화가는 어떻게 `제조`됐나
2001-11-06

잭슨 폴록(1912~56)은 비슷한 연대기를 산 이중섭(1916~56)처럼 `신화'가 된 미국 화가다. 전쟁과 가난, 고독과 몰이해로 고통받았으나 폴록은 살아서 미국의 신화로 `제조'됐고, 중섭은 죽은 뒤 신화로 `부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현대미술이 걸어온 몇 가지 길 가운데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두 사람이다. <폴락>은 바로 그 잭슨 폴록이 어떻게 미국의 신화로 만들어졌는지를 다룬 전기영화이자 예술영화다.

주인공 폴록 역과 감독을 맡은 배우 에드 해리스는 야심만만한 화가 잭슨 폴록이 어떻게 권좌에 오르고 또 좌절해서 나락으로 떨어졌는가를 비교적 담담하게, 요점을 추려 다루고 있다. 예술혼에 쏠린 광기, 비극으로 몰아치는 고갱이나 고흐의 전기영화와 다른 냉정함은 이 때문이다. 예술가가 한 개인의 삶을 온전하게 제 것으로 지킬 수 있었던 건 19세기말에 끝났다. 자본과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가는 20세기에 폴록은 이론가 집단이 만들어낸 스타의 대명사일 뿐이다.

1940년대에 부와 명성을 거머쥐려 “나를 뽑아 줘요”를 외치던 미국 화가들 가운데서 폴록은 행운아였다. 영화가 집중한 것은 폴록이 소원성취한 과정이다. 41년부터 폴록과 함께 살았던 여성 화가 리 크레이즈너(마르샤 게이 하든)는 폴록의 외도로 마음이 돌아서기까지 이 알콜중독 환자에게 변함없는 격려와 지지의 원천이었다. `상류사회의 마담'이자 화랑 주인 페기 구겐하임(에이미 매디건)은 이 다락방 화가를 밑바닥에서 뽑아주는 은총을 내렸다.

그리고 이론가들이 있었다. 뉴욕 `10번가'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던 수많은 화가들을 `말씀'으로 일으켜세운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제프리 탬버)는 전후 뉴욕을 세계 미술판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폴록을 대표주자로 내세웠다. 영화에서 폴록이 갑자기 발견하는 `뿌리고 튀기는 기법'은 캔버스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 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임을 잘 보여준다. 그린버그의 이론이 가리키는 방향을 좇아 `액션 페인팅'으로 무장한 폴록은 캔버스를 자신이 행위하는 투기장으로 보기 시작했지만, 뒤늦게 그 허망함으로 자살한다. 폴록은 과거의 `그 자신'과 `그에 대한 평판' 사이에서 절망한 것이다.

혼돈 속에 급작스럽게 꼭대기로 올려진 이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는 추락도 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잭슨 폴록은 `더 새롭고, 더 훌륭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달려가는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남았다. 씁쓸하고 냉랭한 영화의 뒷맛은 그 삶에서 온다.

정재숙 기자jj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