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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표절의 종류
고경태 2008-04-11

그렇게 당당한 표절은 처음이었다. 6년쯤 전이었다. 사무실로 두툼한 우편물이 하나 날아왔다. 남쪽 지방의 한 도시에서 자칭 ‘소설가’라는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신작 소설이라며 보내온 것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진 한국군 사병과 베트남 여인이 1990년대에 다시 만나 피치 않게 악연을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책을 펼쳐 잠깐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소설의 상당 부분은 당시 내가 일하던 잡지의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 동료들이 쓴 르포기사의 문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기가 막혔다. 짜깁기와 베끼기로 소설을 바느질해놓고서, 원문을 쓴 기자에게 책을 보내주는 것은 무슨 심리란 말인가. 우편물 겉봉엔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당당히 적혀 있었다. 제 기사를 활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전화라도 해달라는 말인가. 항의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첫째, 귀찮았다. 둘째, 표절을 했지만 그가 명성이나 영달을 누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얻을 혜택은 ‘자기만족’ 딱 하나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해,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

물론 그 어떤 표절도 합리화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따끔하게 충고해줬어야 올바른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종합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따지지 않길 잘했다”는 거다. 한달 전부터 폭로된 청와대 박미석 정책수석의 표절 시비를 접하며 그런 판단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두 가지의 표절사건을 비교해보며 가진 자의 표절과 못 가진 자의 표절을 생각해보았다. 비열한 표절과 순진한 표절을 생각해보았다.

두말할 것 없이 그 ‘소설가’ 아저씨의 표절은 못 가진 자의 것이었다. 더불어 순진한 표절이었다. 얻은 거라고는 얼치기로 베낀 달랑 책 한권이었다. 추측건대 그게 ‘표절’인지도 몰랐다. 나에게 책을 보낸 행위가 그걸 증명한다. 박미석 수석은 그 대척점에 놓인다. 일단 그녀는 지금 청와대의 차관급 공무원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있다. 2000년 4월과 2002년 8월, 문제의 학회 논문을 발표할 당시에도 그녀는 대학 교수로서의 권력을 누렸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그녀의 그 우월적 지위와 석사과정 학생 논문에 대한 표절은 서로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비열하다면, 그래서다.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이탈리아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지만 철학자·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교수로서 학부생들의 논문 준비를 위한 책도 썼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열린 책들)이다. 논문을 준비하는 합리적 태도와 방법이 잘 정리되어, 한국의 석·박사과정 학생들도 많이 찾는다. 이 책의 초반부엔 ‘지도교수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챕터가 나온다. 결국, 박미석 수석 같은 스승을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지도교수가 정직하지 못하여 학생들에게 작업을 시키고 학위를 받게 해준 다음에는, 학생들의 작업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활용한다. 때때로 그것은 거의 선의에 가까운 부정직함이 되기도 한다. 즉 교수는 열심히 논문을 지도하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암시해주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이 암시해준 아이디어와 학생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학문적 도용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 중략) 출전을 인용하지도 않은 채 여러분 이전에는 아무도 수집하지 않았던 통계자료를 활용하는 것이다.”

박미석 수석은 권력을 이용해 표절을 하고, 그 결과를 배경으로 또 다른 권력을 얻었다는 의심에 대해 쩔쩔매야 마땅했다. 당당하기만 했다. 당연히 최종의 권력을 놓을 생각도 전혀 없다.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은 장관들은 물러나도, 그녀는 끝내 꺾이지 않고 한달 넘게 버텼다. 지금은 코앞에 다가온 총선에 숨기 딱 좋다.

그래 맞다. 인생은 어차피 표절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두들 누군가를 조금씩 베끼며 살아간다. 티 안 나게 살짝~ 살짝~. 굳이 또 한번 나눠보자면 거시적인 표절과 미시적인 표절이 있으리라. 거시적인 표절이란 흐름에 대한 추종이다. 추세나 스타일을 따라가는 것이다. 친구만의 독특한 공부나 연애의 노하우, 베낄 수 있다. 다른 신문의 글쓰기 트렌드나 스타일 또는 편집 방향, 또 다른 신문이 흉내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중심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것을 미시적으로 실현할 자기만의 색깔과 언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게 가능하다면 표절이라도 창조의 가능성을 품는다. 짝퉁이 원조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면 미시적인 표절은 찌질할 뿐이다. 변명은 더 찌질해진다. 자리도 찌질하게 지킨다면 더 추해질 텐데…. 박미석 수석님, 당신이 잊혀졌을 거라 안심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