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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영화를 본다는 것
김혜리 2008-04-18

시네마테크 부산이 기획한 다섯 번째 ‘월드 시네마’ 상영회에서 3월의 마지막 주말을 보내는 호사를 누렸다. 해운대에 흐드러진 벚꽃이, 서울 사는 내겐 올해 첫꽃인 셈이라, 둔감한 마음도 왈칵 붉어졌다. 우쭐해져 돌아왔더니 그새 서울에도 목련과 개나리가 속임수처럼 당도해 있다. 봄의 북상과 나의 짧은 여정이 정확히 엇갈린 셈이다. 그 미묘한 위화감은, ‘월드 시네마’ 행사 내내 뒷덜미를 간질인 감정과도 흡사했다. 요컨대 “나는 이 영화를 정말 본 것일까?”라는 의혹.

이번 상영작 중 에르마노 올미 감독의 1978년작 <우든 크로그>(The Tree of the Wooden Clogs)가 있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북부 소작농들의 경건하고 고된 삶을 네오리얼리즘과 시인의 눈으로 그린 영화다. 나는 <우든 크로그>를 90년대 초 출시 비디오로 접하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간 내 기억 속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롬바르디아의 마을에는 줄곧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몇주 전 ‘월드 시네마’ 해설 준비를 위해 DVD로 <우든 크로그>와 재회했을 때 일단 영화 속에 햇볕 쨍한 날이 더 많다는 점에 놀랐고, 마을의 신혼부부가 밀라노로 여행하는 시퀀스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십수년 전 본 비디오는 삭제본이었을까? 그때 내린 비는 화면의 흠집이었을까? 그리고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나는 드디어 <우든 클로그>의 낡은 프린트를 극장 스크린으로 보았다. 해진 신발로 절룩이며 하교한 어린 아들을 위해 지주의 나무를 몰래 베어 나막신을 깎았던 가난한 아버지는 기어이 들킨다. 그의 가족이 내쫓기기 전 토지관리인이 가축부터 빼앗아간다. 외양간 문설주에 기대어 끌려가는 소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나는 극장에서 처음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슬픔을 떠올릴 기력도 없이 허물어진 인간의 얼굴을. 그리고 나와 같은 것을 본 관객과 더불어 한숨을 삼켰다. 음향 역시 달랐다. 극장에서 본 <우든 클로그>는 예배당 종소리에 따라 운행되는 세계였다. TV 스피커로 멀리 스쳐만 가던 종소리는 극장 어둠 속에 장중하고 규칙 바르게 울려퍼져 그것이 농민들의 삶을 계량하는 저울이었음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진본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의도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온갖 경로와 자세로 영화를 본다. DVD나 컴퓨터 모니터, 휴대폰 액정으로 보는 반면, 비디오를 스크린에 영사해 보기도 한다. 보다 말기도 하고 되돌려 보기도 하며 2배속으로도 본다. 영화기자나 스탭이 영화를 볼 때처럼 실용적 목표가 분명할 때 관람은 필요한 정보를 캡처하는 ‘샘플링’ 행위가 되기도 한다. 과연 언제 우리는 “그 영화를 봤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내게 이 질문은 게으른 30대가 죽기 전에 볼 수 있는 영화편수가 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제법 절박한 사안이 됐다. 나아가 영화를 향한 애정도 소유욕으로 번진다. 때로 영화를 갈아마셔 내 몸의 일부로 흡수하고 싶은 그 몹쓸 욕심! 우리는 언제 영화를 온전히 가질 수 있을까? DVD와 비디오를 구입해서? 그러나 이 길의 맹점은 영화가 자칫 사용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물신(物神)에 그칠 위험이 있다는 것.

즉,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안심한 나머지 회고전이 열려도 외면하고 집에서도 보지 않는 케이스다. 남겨진 시간을 갖고 우리는 되도록 많은 영화를 들이켜야 할까? 아니면 영감을 주는 영화를 보고 또 보며 비밀을 뿌리뽑는 편이 ‘유리’할까? 가히 입시대책 세우는 수험생만큼 초조하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영화를 ‘점유’라도 하는 방법은 고작 하나. 그 영화에 대해- 괴로워도 슬퍼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