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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육의 유혹, 영혼의 굶주림
2001-11-07

<블러드 솔져>

예전 경험을 돌이켜보면 크게 기대하고 고대하며 기다렸던 영화들을 나중에 보게 되었을 때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영화를 보기 전의 기대감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이상의 좋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여지없이 실망스런 기운이 온몸에 퍼지기 때문일 거다.

그런 반면 전혀 기대하지 않고 뽑아든 영화가 예상 외로 선전해주면 그 또한 어느 영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진득한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전자의 기대했던 영화가 충분한 만족감을 주기 힘든 만큼, 만나기 힘든 경우다.

대개 기대감이 안 들었던 영화들은 여지없이 결과도 백발백중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며칠 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뻔한 제목의 영화에 크게 한방 맞고야 말았다.

흔히 비디오 가게에 가면 제일 많은 제목이 ‘무슨무슨 솔져’, ‘블러드…뭐시기, 저시기…’ 이런 것 아닌가?

근데 이 영화의 제목은 뻔뻔하기 그지없게 <블러드 솔져>다.

그것도 남북전쟁이 배경인 영화에 이런 제목을…. 처음엔 무슨 SF액션 영화인 줄 알았다. 아니면 척 노리스식 비디오 가게용 액션영화이거나…. 그러나 예상 외로 이 영화는 내 맘 가득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알고 보면 제목이 그래서 그렇지 나름대로 곱씹어볼 만한 영화인 <블러드 솔져>의 원제는 ‘Ravenous’로 ‘게걸스럽게 먹는, 게걸든, 굶주린’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아마 왜 이것이 제목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신부의 동성애 사랑을 그린 도발적인 영화 <프리스트>를 만들었던 안토니아 버드,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독특한 음악은 <가타카> <피아노> 등의 음악으로 알려진 마이클 니만과 영국의 록그룹 블러의 보컬인 데이먼 알반이 함께 만들었다.

영화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서 식인이란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얼마 전 <메멘토>라는 영화에서 열연했던 가이 피어스는 전쟁영웅으로 훈장까지 받지만 결국 그 사실이 허위임이 발각돼 캘리포니아 오지의 소규모 부대로 전출당하는 존 보이드 대위를 연기하며, 영국의 대표격 배우인 로버트 칼라일은 부대에 찾아와 자신의 일행을 잡아먹은 식인마를 잡아달라고 도움을 청하러 온 콜 혼이라는 영국인 남자로 열연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독특한 개성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돼가는 듯하다가 이내 갑작스레 공포스러운 이야기로 흘러가기도 하고, 다시 진지한 인간내면의 정체성의 문제를 건들다가 엉뚱스런 사건들을 이어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좀체 종잡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종일관 단순한 멜로디를 반복하면서 기괴한 느낌까지 전해주며 보는 이의 맘을 불안하게 만드는 독특한 음악은 여느 다른 영화에선 들을 수 없는 이 영화만의 별미 중 하나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식인의 행위는 이성의 단계를 넘어서 본능적으로 범한 일로 묘사되는데, 그렇게 한번 인육의 맛을 보게 되면 지속적으로 인육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한 유혹을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확대 생산하려는 자와 그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못 견뎌하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이의 싸움은 그래서 단순히 극의 흥미를 끌기 위한 설정으로만 해석되기보다는 좀더 내면적으로 인간의 정체성의 문제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기도 한다.

이 영화엔 나름대로 이전 <프리스트> 작품과 연결지어 동성애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영화의 의미들을 그렇게 연결해서 동성애적 관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별로 탐탁지 않다. 내가 이 영화에 끌렸던 부분은 그런 단순한 면이 아닌 좀더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재미가 있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양면성과 다변성의 문제 등.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영화에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느끼고 달리 받아들일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비록 함께 보았던 사람들 중 혹자들은 이 영화가 그리 대단치 않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론 기대치 않았던 영화에서 오는 뿌듯함을 넘어서는 다른 즐거움이 있었기에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실 이성의 선을 넘기만 하면 세상은 무서울 게 하나도 없지 않던가. 엄청난 폭탄들을 월드시리즈 야구공 던지듯 무수히 투하하고 있는 현실을 대하면서 그건 정말, 결코, 필시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단상이 머리를 쑤셔댄다.

민동현/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