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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담은 수프 한그릇
2001-11-08

<TV 동화 행복한 세상>

지난 5월 초, 우연히 TV를 켰다가 놀랐다.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늦은 시간에 반가운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투박한 캐릭터와 정지하다시피 한 배경, 극도로 적은 움직임. 그러나 분명 애니메이션이었다. 내레이션 중심으로 진행됐던 5분 남짓한 영상이 그런데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았다.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 그렇게 압축된 감동을 전해오는 옴니버스 시리즈가 KBS2TV에서 방영중인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다.

때는 이른 아침. 어느 순댓국집을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주인은 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애가 앞 못 보는 어른의 손을 이끌고 들어왔다. 너절한 행색과 쾌쾌한 냄새로 주인은 한눈에 그들이 걸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이봐요. 아직 개시도 못했으니까 다음에 와요.” 주인이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대꾸없이 어른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거저먹으려는 게 아니라는 듯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와 동전을 꺼내놓고 순댓국 두 그릇을 주문했다. 주인은 아이를 불렀다. “얘, 잠깐 이리 와볼래?” 아이는 쪼르르 주인에게 달려왔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 수 없구나. 거기는 예약 손님이 앉을 자리라서.”

“아저씨. 금방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는 잔뜩 움츠린 채 주머니 여기저기에서 동전 한 주먹을 꺼내 보였다. “어, 그래? 그럼 저기 끝자리에 가서 먹을래?” 주인은 화장실 바로 앞자리에 그들을 앉히고 순댓국 두 그릇을 갖다 줬다. 그리고는 계산대에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기다려.” 아이는 자기 그릇에 있는 순대를 아버지 그릇으로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소금으로 간을 했다. “아빠. 이제 됐어.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순댓국이야.” 볼이 간장종지처럼 푹 패인 아빠는 손을 떨면서 국밥 한 수저를 떴다. 수저를 들고 있는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음식을 다 먹은 아이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 넉장과 동전을 가득 내밀었다. 주인은 천원짜리 두장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줬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애써 웃으며 아픔을 감추는 아이와 서글픈 아빠의 얼굴을 주인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지난 9월25일 방영됐던 ‘아버지의 생일’ 에피소드다. 4월30일부터 현재까지 방영된 에피소드는 총 120여편. 언뜻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하지만 <TV 동화 행복한 세상>은 시청자들이 보내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원작 사용료를 일일이 지불할 정도로 판권을 꼼꼼하게 처리하고 있다. 매 에피소드는 수채화 같은 배경과 투박한 캐릭터, 호소력 있는 내레이션으로 구성된다. 투박하지만 정확한 이미지 묘사. 담담한 내레이션은 아나운서 이금희가 맡았다.

애초 <TV 동화 행복한 세상>을 기획한 것은 KBS 애니메이션팀이 아니었다. 2000년 말부터 준비를 시작해 부서를 옮기면서까지 시리즈를 이끌어온 사람은 KBS 박인식 프로듀서다. 그가 이 시리즈에서 굳이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디지털 미술과 따스한 감동을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장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운 그림이 한장 한장 이어져 지구를 감쌀 때까지’ 따뜻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고 밝힌다.

5분이 채 안 되는 길이지만 국산작으로는 드물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소개되고 있는 점은 색다르다. 애니메이션에는 좀처럼 개방되지 않았던 오후 8시45분이라는 시간대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날 오전 8시45분에는 재방송도 해준다. 이 시리즈를 제작하는 업체와 그룹은 총 15개로, 대구에 기반한 단편애니메이션제작집단 모션&픽쳐, 애니웍스, 인터넷만화포털업체 마나로엔터테인먼트 등 모두 소규모 집단. KBS 홈페이지(www.kbs.co.kr)에서 지난 방송과 그들의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의 매력은 감동이다. 감동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가슴을 일깨운다. 우리는 사람이었다고, 인간은 원래 따스했다고 매일 방영되는 짧은 에피소드는 말하고 있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