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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달의 정복자
2001-11-08

이유정의 신작 SF <MOON>

오늘, 달을 보았다. 달은 가장 커다랗게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걸쳐 있었다. 인간이 달을 바라볼 때부터, 달은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우리는 달을 보며 인간이 지닐 수 없는 에너지를 떠올렸고, 우주의 스펙터클을 디자인했다. 만월이 뜨면 나타나는 괴물이나 달에 세워진 식민지나 달에서 온 괴물이라는 소재는 판타지와 SF에 친숙하게 사용되던 것이다. <러브머신>과 <요동의 뱀파이어>를 통해 섹슈얼리티와 폭력이라는 두개의 키워드를 SF와 판타지의 상상력에 유려하게 실어낸 이유정은 <아시안> <가물치전>을 통해 SF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안타깝게도 데뷔 초기에 보여준 기대에 비해 후속작에서는 상업적 성공이나 비평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유정의 <MOON>은 달에서 시작된다. 달의 미개척지 탐사선에 근무하던 미나는 범죄자들에게 폭행당하고 살해당한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미나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구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 자란 지타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 친구(미유키, 루니)와 함께 폭력서클 핑크클럽을 만들어 조직을 와해시키는 여고생이다.

지구는 정체불명의 거대 로봇에 공격을 받는다. 거대 로봇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살육한다. 인류는 달에 생존의 터를 잡았고, 달에 모인 인류의 지도자들(<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제레’ 같은)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영원의 아이 프로젝트를 시행한다(‘네르프’같은 조직에서). 지타는 영원의 아이를 위한 소모품으로 연구소 같은 조직에 들어온다.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달을 지배하게 될 영원의 아이라고 생각했던 지타는 폭주, 양아버지의 죽음, 자신을 피하는 친구들에게 상처받고 결국 자신이 소모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타의 내면은 철저히 파괴된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있던 지타는 달의 아이 중 한명인 케이와 싸우다가 엘을 위한 화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자아가 죽어버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텔레파시로 늙어버린(<아키라>의 ‘실험체’ 같은), 그래서 대용품인 지타를 필요로 하는 엘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일어난다. 생명체를 못 죽이는 엘은 자신이 흡수해야 할 지타에게 흡수되어버린다. 여기까지가 단행본 2권과 인터넷 사이트 연재분 31회까지의 이야기다.

힘의 섹슈얼리티

이유정이 보여주는 섹슈얼리티는 그가 집착하는 세라복, 짧은 치마에 긴 다리, 루즈삭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여주인공, 하얀 팬티라는 몇 가지 요소에 집약된다. 언뜻 매우 전형적인 섹슈얼리티의 관습으로 보이지만, 미소녀 캐릭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소녀 캐릭터는 귀여운 얼굴에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를 특징으로 한다. 일본의 18금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디자인된 미소녀 캐릭터는 지금은 꽤 많은 만화를 통해 익숙해져 있는데, 가슴이나 엉덩이가 비정상적으로 강조된 이들 캐릭터는 원시시대에서부터 존재했던 다산을 상징하던 여성상에 근접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눈에 귀여운 얼굴과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는 남성들의 보호본능과 동시에 정복욕을 자극한다. 그걸로 끝이다.

반면, 이유정의 캐릭터는 복잡하다. 거대한 가슴이나 엉덩이도 없고, 얼굴은 어려보이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관음의 시선이 허락되는 건, 담임이 웃옷을 벗겨버릴 때 드러나는 루니의 가슴, 어린 왕자가 그린 루니의 누드, 식물원의 주인이 훔쳐보는 지타의 팬티, 어린 왕자가 바라본 루니의 팬티를 훔쳐볼 때 정도이다. ‘세라복’이라는 일본식 섹슈얼리티의 기표에 가둬진 그녀들의 육체보다 강렬한 것은 힘이다. 지타, 루니, 미유키는 힘으로 근처의 조직을 격파하며 달의 지배자가 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특히 주인공 지타는 수백 대 일의 대결에서도 승리하는 폭주의 힘까지 지니고 있다. 루니를 납치해 나체로 묶어 놓은 55블럭의 조직 전체를 지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한다. 관음의 시선은 어느새 여성의 공격에 대한 남성의 공포로 이어지고, 지타의 힘에 으깨어지는 남성들을 보며 마조히즘적 환상을 충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MOON>의 섹슈얼리티에 동요가 없는 건 아니다.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여신들’ 중 한명을 남성이 조종한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핑크클럽의 3인조 중 한명인 미유키는 지구의 전장에서 하평을 부상입게 한 남자친구 때문에 새로 부임한 선생 하평의 노예가 된다.

달과 지구에서 전개되는 SF의 변주들

<MOON>은 이유정 특유의 섹슈얼리티를 기반으로 달과 지구에서 각각 특색있는 SF의 양상을 변주해낸다. 친구를 지구로 보냈다는(실은 지구가 아닌 달의 연구조직으로 잡혀간) 자책감에 범죄자들과 무차별 살육의 외계인들이 우글거리는 지구로 내려간 미유키의 이야기는 마치 밀리터리 SF를 보는 느낌이며, 제레와 네르프 그리고 <아키라>의 실험체를 연상시키는 지타의 이야기는 사이버펑크를 보는 느낌이다. 이 두 가지 SF의 변주가 각각 흥미롭게 진행되면서 <MOON>을 만들어간다. SF에 관한 한 이유정은 우리나라에서 자기 색을 가진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러나 아직까지 완전하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지 못한, 미완의 기대주다.

박인하/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