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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한고은

한동안 <천하일색 박정금>을 봤죠. 꾸준히 본 건 아니고 그냥 중간부터 몇주 동안 봤던 겁니다. 원래 전 주말연속극은 꾸준히 못 봐요. 인내심이 부족하고 적당히 에피소드를 건너뛰며 볼 만큼 느긋한 성격도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잡고 앉아 그 연속극을 봤던 건 연속극 고정 시청자에겐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으니…. 이런 거였습니다. 전 우연히 소녀시대 멤버 윤아가 연기한 캐릭터가 살인죄로 체포되는 걸 봤어요. 아무래도 진범은 아닌 것 같았고요. 근데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진범이 안 잡히는 겁니다. 제 성격에 이런 건 못 참죠. 범인이 잡힐 때까지 봐야 해요. 어떻게 되었냐고요? 잡히긴 잡히더군요. 제대로 된 클라이맥스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서 실망했지만. 교훈 얻었어요. 주말연속극에 섞여 들어간 살인 이야기에서 전문 수사극의 치밀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살인범을 기다리느라 참고 있는 동안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이 시리즈의 팜므파탈 사공유라(도대체 무슨 이름이 이래요?)를 연기한 한고은에게 놀랄 만큼 관대해졌다는 것이죠. 전엔 그 덜컹거리는 발성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을 보는 동안 전 그걸 당연한 개인적 스타일로, 그것도 꽤 매력적인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캐릭터 때문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캐릭터라면 <경성스캔들>의 차송주가 훨씬 매력적이에요. 사공유라는 딱하고 진부하고 한심합니다. 동정할 수는 있어도 견디긴 힘들죠. 순전히 드라마의 방해물로 태어난 캐릭터입니다. 전생에 작가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렇다면 그동안 제가 한고은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걸까요? 아뇨, 그 정도로 한고은의 경력을 치밀하게 따라간 적은 없어요. 특히 <사랑과 야망>은 거의 보지 못했지요. 강지환 열성팬과 같은 집에 살고 있어서 <경성스캔들>의 차송주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지만요.

그냥 감만 믿고 대충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전 <경성스캔들>과 <천하일색 박정금>을 비교해봤습니다. 다시 보니 <천하일색 박정금>의 테크닉, 특히 발성 테크닉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긴 해요. 여전히 연기 스타일은 양식화되어 있고 영어 억양이 지워지지 않은 대사 톤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조금 더 노련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쌓은 경험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대극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군요. <경성스캔들>과 같은 시대극에선 과장된 연기가 용납되기 때문에 자신의 스타일과 억양을 고수할 수 있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이나 <꽃보다 아름다워>와 같은 앙상블 위주의 현대 배경의 연속극에서는 자신을 주변 환경과 맞추어야 하죠.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고 있었던 건 드라마의 스토리와 별개로 진행되는 한 배우의 투쟁인 겁니다. 어떻게 텔레비전 세계에서 정착하고 호평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의 테크닉에 완전한 확신이 없는 한 배우가 쟁쟁한 전문 배우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깨보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완전히 성공한다면 배종옥의 노련한 연기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한고은은 여전히 두 세계 중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채 방황하고 있고 저에겐 그게 정말로 흥미진진해요. 심지어 캐릭터와 드라마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론 이건 보편적인 매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여전히 한고은의 발성에 신경이 쓰여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배우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니 좋은 연기라고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배우의 연기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고, 배우를 보는 재미가 꼭 연기 테크닉과 비례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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