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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만들기에 도전하는 독립영화제작 워크숍 현장 밀착취재 [1]
장영엽 사진 이혜정 2008-06-12

첫째 날, 5월19일 월요일 _ 독립영화와 친해지기

취재 한 시간 전, 광화문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 도착했다. 첫 출근날 첫 취재라니. J선배가 함께 있어주어 든든했지만, 한편으로는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독립영화 감독들과 함께 옴니버스영화 만들기’ 강좌가 시작되는 오후 일곱시, 센터 안은 조용했다. 고개를 숙인 채 안내문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긴장감이 축적된 무거운 침묵이 강의실 공기를 타고 흘렀다.

제일 먼저 총대를 멘 사람은 이송희일 감독이다. 19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지는 독립영화제작 워크숍의 첫 강사로 나선 그는 ‘독립영화의 과거와 내일’이란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인디영화 수준의 예산으로 촬영한 <디 워>는 독립영화일까요, 아닐까요? 스스로 독립영화인을 자처하는 김기덕 감독의 <숨>은요?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독립영화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남겨둔 채 그는 “강사를 닦달해 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라”며 혈혈단신 떠나갔다. 이 감독의 빈자리를 다섯명의 감독이 채웠다. <우린 액션배우다>의 정병길 감독, <불을 지펴라>의 이종필 감독, <구보씨일보>의 신이수 감독, <진영이>의 이성은 감독, <아이들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다>의 남다정 감독. 모두 독립영화 작가 집단 ‘인디포럼’ 출신이다. 이들은 이번 워크숍의 지도 강사로서 각각 여섯명의 수강생을 맡아 단편영화 제작을 지도하게 된다. 학생들은 혹여나 자신의 지도 감독이 될지도 모를 감독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막상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 감독들의 첫인상과 이력이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감독님들이 어떤 분위기의 작품을 만드시는지 알려 달라”고 청했다. 이에 진행자는 천천히 화이트보드에 감독의 이름과 이들의 영화적 특성을 써나갔다. “남다정-차분, 신이수-재기, 이성은-세련, 이종필-우직, 정병길-재기발랄….” 이 역시 충분한 설명은 아니지만 수강생들이 그제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병길 감독님으로 해주세요.” “이성은 감독님 팀 할게요.” 칠판의 여백이 학생들의 이름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다섯개의 모둠 구성이 끝나자 각 팀은 그들의 첫 번째 프로젝트를 위해 미디액트의 다른 강의실로 흩어졌다.

기자가 들어간 곳은 정병길 감독의 조. 지도 감독을 정할 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쟁했던 팀이다. 힘들게 선택된 만큼 여섯 명 모두 적극적으로 행동할 줄 알았는데 아직은 서먹서먹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할 겸 각자 워크숍에 참가하게 된 계기를 말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통해 미디액트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는 이해인씨, 친구가 신청했다는 말을 듣고 인디포럼 홈페이지에 놀러갔다가 덜컥 등록해버린 성기혜씨, 서른 살에 만들기로 계획한 영화의 준비과정으로 생각한다는 김정현씨는 모두 나름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단편영화 연출부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한영준씨나 한국영화교육원에서 촬영을 공부하는 최성민씨처럼 직·간접적으로 영화제작을 경험한 이도 있다. 연극을 전공했지만 영화에 대한 열렬한 관심 때문에 무엇이든 시도해보기로 했다는 박지연씨의 말에 정병길 감독도 “저도 무작정 영화판에 뛰어들어 동물적인 감각으로 익혔다”고 화답했다. “많이 깨져봐야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클래스는 여러분들이 영화를 만들고, 저는 옆에서 조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수업이 있는 수요일까지 여섯명의 조원 모두 5분 분량의 시놉시스를 구상해오는 것으로 첫 강의는 끝이 났다.

둘째 날, 5월21일 수요일 _ 밑그림 그리기

촬영과 녹음을 배우고 편집도 직접 해보는 날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화의 밑바탕이 될 시나리오 선택이다. 시나리오 수업이 열리는 오후 다섯시에 맞춰 미디액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예감이 심상치 않다. 정병길 감독의 조가 수업을 받기로 했던 곳에 다른 팀이 있는 것. 불길한 예감에 벽에 붙은 시간표를 확인해본다. 미리 받은 안내문과 달리 정 감독 팀의 시나리오 수업은 이미 다섯시에 끝난 뒤였다. 사정에 따라 시간표가 유동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눈앞이 아찔해져 정신없이 정병길 감독을 찾다가 편집 수업을 듣기 전 휴식을 취하던 조원들과 마주쳤다. 질문을 쏟아내는 초짜 기자에게 친절히 답변해주던 이들은 “아직 시나리오를 선택한 건 아니니 걱정 말라”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곧 만난 정병길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기자가 흥미로웠던 에피소드를 묻자 그는 “음, 그러니까…”를 반복하며 성심성의껏 시나리오 수업시간을 재구성해주었다.

“학생들이 써온 시나리오 중 세개 정도가 마음에 들었어요. 나머지 작품도 괜찮기는 한데 하루 만에 찍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감독을 꿈꾸는 세명의 친구들이 한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소매치기 집단의 2인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마지막 시나리오는 개를 키우는 음침한 여자와 그 개의 사진을 허락없이 찍은 사진작가가 설전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이 셋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 같아요.” 정 감독은 수업을 진행하며 각 시나리오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자신의 생각과 너무 비슷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번도 영화를 찍어보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시나리오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꼭 짚고 넘어갔다고.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이틀 만에 서서히 조성되는 팀워크다. “수강생들이 어제 인터넷으로 제 첫 번째 영화 <칼날 위에 서다>를 보고 왔더라고요. 어떤 분은 제가 첫 영화를 어떻게 찍게 됐는지 궁금해서 그 당시의 인터뷰를 읽었대요.” 서로를 알아가는 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일 테다. 이들의 팀워크가 앞으로 얼마나 견고해질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정병길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매치기 집단의 2인자를 다룬 시나리오가 최종적으로 선택됐으며, 촬영은 지하철 5호선과 신촌 굴다리 등지에서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정병길 감독 조가 선택한 시나리오 <내가 달리는 이유>

줄거리는? 소매치기 집단에 입양된 고아 A는 항상 집단 내에서 2인자에 머무는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그는 지하철에서 한 여고생의 가방을 훔치나, 지갑은 찾지 못하고 그녀의 다이어리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1등이 되지 못하는 2등 여고생의 비애가 적혀 있다. 이를 본 소매치기 A는 세상에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탈해한다.

등장인물은? 소매치기 A(2인자), 소매치기 B(1인자), 여고생, 소매치기 당하는 행인

촬영장소는? 정병길 감독의 집, 지하철 5호선 방화역, 신촌기차역 굴다리, 신촌 인근 하숙촌 골목 계단.

소품은? 일기장, 지갑, (여고생의)가방과 교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