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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마케팅 다이어트가 대세?
이영진 2008-07-15

한국영화 불황 속에 사라지는 마케팅 인력들과 이를 둘러싼 고민

한국영화 제작사에 마케터가 없다? 한국영화 제작사들이 속속 마케팅팀을 해산하고 있다. 한때 마케팅팀 인원이 15명을 넘나들었던 싸이더스FNH의 경우, 관련 업무를 위한 최소 관리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사를 떠났다. 싸이더스FNH는 관련 인력들이 퇴사한 뒤에 신규 인력을 충원하지 않았다. 아이필름 또한 얼마 전 구조조정 차원에서 상주 제작팀과 마케팅팀을 정리했다. 이유는 역시 경영상의 어려움 때문이다. 한때 기획실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영화인력 양성소로 기능했던 마케팅 인력 중 상당수는 새로 홍보대행사를 차리거나 아니면 영화쪽이 아닌 타 분야 마케팅 회사로 빠져나간 상태다.

이 같은 분위기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최근 필름있수다도 마케팅 업무 직원들을 내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상반기 동안 씨네라인2, 아이엠픽쳐스, 프라임엔터테인먼트 등 투자, 제작사들이 마케팅 부서를 없애거나 영화사업을 정리했다. 현재 제작사 안에 마케팅팀을 두고 있는 회사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MK픽쳐스, 영화사 집, 영화사 반짝반짝, 청년필름, 외유내강, 도로시 정도다. 이 제작사 중 상당수는 타 영화사 작품의 홍보대행 업무를 맡아 경상비를 확충하고 있다. 신규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제작사나 신생 제작사들도 새로 마케팅팀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사, 홍보대행사 등과 업무를 조율할 1, 2명의 인원만을 충원하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계획된 조절이 아닌 강요된 다이어트

불황의 질곡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세한 제작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입을 줄이는 것이 최선으로 제시된다. 제작사들이 몸집을 줄이는 과정에서 마케팅팀은 “언제나 정리 1순위”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투자·배급사들이 경상비를 한방에 ‘쏘는’ 과거였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최근 1, 2년 동안에는 그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미 지난해부터 이른바 경상비를 포함한 투자·배급사의 ‘묶음 투자’는 모습을 감췄다. 지난해까지 제작사에서 일했다가 권고사직 형태로 퇴사한 한 마케터는 “평균적으로 제작사가 1년에 굴릴 수 있는 프로젝트는 많아야 2편 정도다. 그런데 1편이 투자를 받지 못해 엎어지면 제작사로서는 그 이후를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마케팅팀은 곱절의 부담이다. 월급 받는 입장에서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눈치 보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년 내내 마케팅팀을 운영하는 것보다 다른 회사에 홍보대행 업무를 맡기는 것이 실제로 비용이 덜 든다. 영화의 크기나 계약 시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현재 홍보대행사가 한국영화 1편을 맡을 때 받는 돈은 대략 6천만원 선이다. 제작사가 연간 1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2∼3명의 마케팅팀을 상시적으로 고용하는 데 드는 연간 경상비보다 적게 든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현재 투자 환경에서 제작사가 연간 1편의 영화를 내놓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설령 만들었다손 치더라도 “촬영이 종료되고 개봉이 코앞인 상황에서 돈을 구하기 위해 제작사들은 동분서주해야 하는” 엄혹한 시절이다. 얼마 전 제작사를 그만둔 한 마케터는 “영화계가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마케팅부터 매를 맞아야 하는 현실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계획된 조절이라기보다 강요된 다이어트라는 점 때문에 볼멘 목소리는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연간 3편 이상을 충분히 내놓을 만한 여유가 있다고 여겨졌던 규모의 제작사들조차 이 같은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메이저 제작사에서 일했던 한 마케터는 “마케팅팀 거의 모두가 자진 퇴사하고 신규 인원을 확충하지 않는 형태로 팀이 없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모 기업의 압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든든한 전주를 곁에 낀 제작사들도 허리를 졸라매야 하는 입장인 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또 다른 마케터도 “모기업이 몇년째 관련 사업에서 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자회사인 제작사 또한 적지 않은 수익률 압박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고, 구조조정 또한 이 같은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업무의 효율성을 떠나 유능한 마케팅 인력의 이탈은 큰 문제

물론 이를 달리 보는 시각도 있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최근 1, 2년 동안 영화 마케팅 규모, 방식 등이 완전히 바뀌었고, 이제는 기존의 제작사 인력들이 중심이 되는 마케팅은 한계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설립 당시 2명에 불과하던 마케팅 인원이 현재는 10명을 넘나들고 있지만 업무가 많아 손이 부족할 정도라는 쇼박스의 한 관계자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글로벌 마케팅이나 <웰컴 투 동막골>의 10만 관객 시사회 등을 제작사에서 추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한 뒤 “투자사가 마케팅을 주도할 경우 엔터테인먼트 계열사 등을 통한 다양한 전략을 일찌감치 구사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CJ 역시 홍보팀을 지금보다 대폭 늘리는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사가 기획부터 개봉까지 관장해서 한편의 영화를 내놓는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는 주장이다. 투자·배급사가 직접 제작에 나서기도 하는데 굳이 제작사가 마케팅팀을 꾸려야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올해 초까지 제작사에서 근무했던 한 마케터는 “투자·배급사들이 감독, 프로듀서들과 직접 테이블을 만드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면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마케터들이 결합해 영화의 컨셉을 정하고 개봉 전까지 관객과의 접점을 찾아내는 과거의 메이드 방식들은 요즘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조은영 팀장도 “과거에는 어느 한쪽이 돈을 대고 어느 한쪽이 제작 전반을 맡았다면 이제는 어느 한쪽이 주도할 수 있는 때가 아니라”며 “상호 긴장과 존중을 전제로 제작사든 투자·배급사든 홍보대행사든 한편의 영화를 어떻게 만들고 포장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엠픽쳐스의 한 관계자도 “2006년까지만 하더라도 마케팅을 통해 영화를 성공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이후로는 대부분 실패했다”면서 “제작사들이 마케팅 업무를 떼낸 것은 경상비 절감 측면도 있지만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고 덧붙인다.

인위적인 구조조정이냐 자연스러운 업무분화냐를 따지는 것은 더 두고볼 일이긴 하다. 하지만 거품을 줄인다는 이유로, 주도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그동안 자산으로 여겨져왔던 유능한 마케팅 인력들의 이탈을 방관할 순 없는 일이다. 과거 제작사에서 일했던 한 마케터는 “&#51922;겨났다기보다 이미 그전에 다들 마음이 떠났던 게 아닐까”라고 물으면서 “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포장해야 할 마케터들에게 그동안 충분한 동기와 기회가 주어졌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한다. 제작사에 남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내 건 홍보대행사를 차리거나, 아예 다른 분야로 둥지를 옮기거나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마찬가지 아닐까. 아니 위기의 지속 아래서 이 같은 고민들은 비단 마케팅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의 마케팅 구조조정을 둘러싼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

“OO픽쳐스는 마케팅팀을 해산한 게 아니다. 지금 현재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품이 끝나고 공교롭게 팀장들이 개인 신변의 문제 때문에 그만두게 된 것일 뿐인데 소문이 그렇게 났다. 다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마케팅팀을 정리하다 보니 그런 오해가 있었나 보다. 제작사가 마케팅 업무를 맡을 인원을 두지 않는다기보다는 프로젝트에 맞춰 소규모 관리자를 두는 형태로 갈 것 같다.”(영화 마케팅 대신 다른 출구를 타진해보고 싶어서 제작사에서 퇴사했다는 A씨)

“심장이나 몸통을 잘라낼 순 없으니 팔, 다리를 잘라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 다리 입장에서는 열받는 일이다. 흔히 마케팅 업무는 하청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마케팅 인력 또한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게 대부분이고. 마케팅이 중요하다면서 그동안 관련 업무나 인력 챙기는 데 소흘했던 제작사에 대한 원망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제작사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떠밀려 제 살림 차리게 됐다는 마케터 B씨)

“제작사에서 마케팅팀을 없애기 시작한 게 최근의 일은 아니다. 요즘 워낙 경기가 안 좋으니까 더 불거진 것이지. 프로젝트에 따라 회사를 옮기거나 새 회사를 만드는 프리랜서에 가까운 직무의 특성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제작사에서 굳이 마케팅팀을 둘 이유가 없다고 본다. 투자사나 다른 홍보대행사의 기능과 중복되는 측면도 있고.”(제작사가 영화의 공정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쥐고 챙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전 투자·배급사 마케팅 관계자 C씨)

“제작사 규모를 줄인다고 기획에 집중할 수 있나. 그렇게 해왔으면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너들은 마케팅팀을 정리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많은 직원들이 그동안 왜 수없이 들고났는지를 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실무자들이 끊임없이 교체됐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이제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끝까지 남아 있다. 이상한 구조다.”(지금은 잠시 다른 업계에 몸담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영화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전 제작사 마케팅 관계자 D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