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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거대 신문사의 횡포를 고발하고 싶었다
장영엽 2008-07-17

다큐멘터리 <뉴스페이퍼맨-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의 김은경 감독

2006년 12월22일, 한 남자가 집 근처 식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억3천만원의 빚과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그가 남긴 전부였다. 다음해 1월,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읽고 한 여자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메이저 신문사의 지국장이었던 남자가 신용불량자로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남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질문은 여자의 취재를 거쳐 신문사의 불법 판촉 경쟁과 사법부의 외면이라는 사회적 병폐와 마주하게 된다. 이상이 김은경 감독의 40분짜리 다큐멘터리 <뉴스페이퍼맨-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의 탄생 배경이다. 김 감독은 “동아일보사 갈현지국장이었던 고 박정수씨의 죽음을 통해 개인에 대한 거대 신문사의 횡포를 고발하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6월30일 인디스페이스의 공식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김은경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네티즌의 높은 관심 속에 7월5일 공공미디어연구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뉴스페이퍼맨-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의 반응이 좋다. =요즘 메이저 신문사들이 대중의 질타를 받고 있지 않나.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다. 아는 사람들한테 문자 많이 받았다. “(포기할 줄 알았는데) 결국 만들어냈구나”라고들 하더라. (웃음)

-이 주제를 다루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메이저 신문사의 지국장이라면 최소한 먹고사는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더라. 박 지국장은 성실하게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처음엔 지국장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휴머니즘적인 마음으로 취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취재를 하다보니 공정거래위원회나 사법부 등 여러 기관들이 얽혀 있더라. 또 신문사의 불법판촉에 대해 대중이 분명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메이저 신문사들은 이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고. 단편영화로 만들면 수박 겉핥기밖에 안 되겠다 싶어 장편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처음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극영화를 생각했었나. =그렇다. 리얼리티를 살린 장편 극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수습 여기자가 주인공인, 40명이 등장하는 영화. <한겨레> 윤은숙 기자에게 부탁해 그분을 한달간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제작비가 내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더라. 결국 고민 끝에 내가 스탭과 배우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노력은 했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으나) 한 유명 감독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감독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시간낭비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뻔한 얘기라고, 이거 붙들고 있을 때 다른 경쟁자들이 은경씨 시체를 밟고 올라갈 거라고 하셨다. (웃음) 충무로가 만만한 곳이 아니란 걸 느꼈고, 한편으론 굉장히 상업적인 마인드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난 오히려 감독님 말을 들으니 혼자라도 꼭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돌아와서 필름 메이커스에 모집 공고를 냈더니 촬영감독님들이 많이 지원해주셨다. 해외에서도 메일이 오고, 오디션을 봐야 할 정도였다.

-만들면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정말로 각개격파했다. (웃음) 오디션으로 뽑은 촬영감독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엄청 울고, 장편영화에서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급전환하는 과정에서도 고민이 많았고. 미디액트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기간이 한달밖에 남지 않아 짧은 시간 내에 다큐멘터리 한편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지율 스님의 말씀 중에 ‘인드라’란 개념이 있다. 사회는 거미줄처럼 모든 게 다 연결돼 있는데, 어느 한곳에 생긴 균열이 전체를 마비시킨다는 내용이다. 신문시장이란 여론을 반영하는 곳인데, 언론사가 독과점을 행사한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흘러갈 수 없다. 박 지국장님이 죽음으로 이러한 부당함을 알렸다고 생각하고, 그 힘이 나에게 전해져서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선진화된 사회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에서 공무원을 하다가 영화를 시작한 이력이 독특하다. =영화를 할 생각은 대학 4학년 때부터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는데 1895년의 활기찬 느낌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더라. 그때 시공간을 넘어선 영화라는 작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전공이 일어과였는데 우연히 일본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붙었고, 한국과 일본의 국제교류 일을 하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한살이라도 어릴 때 영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은 “호적에서 파겠다”며 엄청나게 반대하셨지만, 결국 영화를 하게 됐다.

-원하던 걸 하게 되니 행복한가. =일본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돌아올 땐, 솔직히 어둡고 긴 터널 속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지국장님들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지금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편으론 무척 자유롭다. 난 지금 상영관을 구하러 뛰어다녀야 하는 힘없는 독립영화 감독이지만,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면 이렇게 자유롭지는 못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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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