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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우스꽝스러운 천재, 열성스런 장인

탄생 100주년 맞은 최초의 만화영화 <팡타스마고리>의 제작자 에밀 콜의 일생에 대하여

영화의 선구자들에게는 비행술 선구자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들은 환상의 천재성을 가진 우스꽝스런 기술공들이었고, 제대로 된 예술가라기보다는 열성스런 장인들이었다. 이 ‘위험인물들’ 중 일부는 오늘날 부당하게도 잊혀진 인물들이 됐다. 영화사상 최초의 만화영화 <팡타스마고리>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놀라울 만큼 조용한 가운데 맞이한다. 작품을 제작한 프랑스인 에밀 콜은 콧수염을 그럴듯하게 단 두루뭉술 살이 찐 괴짜였다.

<팡타스마고리>는 하나의 흰 선에서 시작된다. 그 선은 피에로가 되고, 다시 우산을 든 사람이 된다. 이어 영화관이 나온다. 피에로가 좌석에 앉자 또 다른 피에로가 나타나 그의 가발을 벗기고, 어떤 여자의 모자에 달린 깃털 속으로 잠수한다. 기상천외한 변신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감독의 두손이 튀어나와 모든 걸 원위치시키고… 연결회로는 닫힌다. 이 영화에는 카드놀이에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시적 운치가 있고, 고속의 언어구사로 빵가루 모으는 그릇 하나로 기술혁명까지 일으키는 길거리 포장마차 주인들이 가진 매력이 있다. 이러한 정신은 작품은 물론 그것을 만든 이의 성격과도 맞아떨어진다. 콜이 <팡타스마고리>를 만든 건 그의 나이 50이 넘어서였다. 이전에 콜은 향수가게, 포도주가게, 보석상점 혹은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그는 또한 한때 연극배우였고 마술사, 사진사 같은 직업에도 종사했다. <팡타스마고리>에는 이 같은 그의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다. 일반인에게 콜은 일간지에서 당대 저명인사들을 풍자하는 만화가로 먼저 알려진다. 그 당시 이미 그가 그린 만화는 중첩기법을 사용하는 몽타주 만화였다. 마치 일련의 시각적 충격효과를 노리는 듯 작가는 한컷에 다양한 색과 여러 개의 이마주들을 겹쳐놓는다. 그의 만화가 가진 날카로운 선과 거기서 나오는 냉철한 정신 때문에 콜이 결투에 휘말린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 임종시 헛소리까지 하던 콜은 당시 유명 인사들이 아직도 자신을 암살하기 위한 모략을 계획 중이라고 믿고 었었다.

콜은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다. 당시는 예술가들이 일정한 클럽이나 유치한 저녁모임에서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리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땐 선술집에서 무명시인이 피곤에 지친 창부를 붙들고 한참 수다를 떨거나 유리창 갈러 온 사람에게 술잔을 권하던 시대였다. 당시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현대 대다수 영화에서처럼 캘빈 클라인 향내가 나지 않고 땀냄새가 풍겨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축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식용 아티초크나 피에로로 변장한 콜, 전설 속 영웅의 모습으로 말을 타고 파리를 횡단하던 콜을 마주치곤 했다. 이런 그의 변장술 역시 <팡타스마고리>에 잘 드러나 있다.

우연히 고몽영화관에 고용된 이후, 콜은 혼자서 <팡타스마고리>를 만든다. <팡타스마고리>는 그가 직접 조명조작카메라(camera Lumiere bricolee)를 가지고 하나하나 포착한 2천개 이상의 이마주로 구성돼 있다. 흥행은 즉각적이었다. 그 뒤 콜은 다른 애니메이션영화는 물론, 특수효과를 기본으로 사용하는 기가 막힌 코미디 단편영화들을 만드는데, 이들 ‘트릭영화’에서 그는 만화와 실제 촬영을 번갈아가며 편집하기도 한다. 또한 콜은 미키 마우스가 나오기 10년 전인 1916년에 만화를 각색하여 인간처럼 움직이는 동물들이 나오는 영화를 처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나 그의 천재성은 장인의 수준을 지나 산업적 단계로 넘어가서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콜은 1938년 1월20일 가난 속에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다음날, 또 한명의 영화의 선구자 조르주 멜리에스가 빈털터리가 되어 세상을 떠난다. 콜은 그가 했던 마지막 인터뷰 중 하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예술가나 연구자, 학자들이 일단 죽고 나야 그들을 사랑하는 나라다. 그들 위에 얹힌 화환과 대리석과 더불어.”

번역 조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