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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한국영화 지지자들의 고향을 만드는 법

한국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이국의 작은 도시에 관해 생각하다

이번주 알부크에르크 도시의 재즈를 다룬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문득 한국영화를 생각했다. 미국 남서쪽의 작은 도시에서 어떻게 이처럼 활기찬 재즈신이 꽃피게 되었는가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다. 사막 지역에서 재즈가 꽃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빼어난 재즈 뮤지션들은 대개 뉴욕이나 LA 같은 큰 도시에서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고 알부크에르크에 특별한 재즈 전통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1975년경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자칭 자신을 재즈 팬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여덟명의 사람들이 뉴멕시코 재즈 워크숍을 시작하고 30년 뒤 많은 뮤지션들이 그 도시에 살게 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러 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알부크에르크는 재즈에 대해 해박하며 열정적인 청중을 갖게 되었다.

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가 한 가지 가상적인 상황을 그려보았다. 북아메리카나 유럽의 작은 도시에 극장이 있고 1년 내내 한국 (또는 아시아) 영화를 상영한다면, 그곳은 한국영화 열성 지지자들의 고향이 되지 않을까. 물론, 세계 여러 도시에 이미 아시아나 한국영화를 보여주는 영화제들이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사들은 크리스마스처럼 잠깐 지나가는 행사들이다. 이쯤 되면 이미 내 자신도 공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다는 건 뻔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1년 내내 이런 행사가 지속될 수 있다면… 혹은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꿈을 꾸어본들 뭐 나쁘랴?

먼저, 어떻게 재즈가 알부크에르크에서 꽃피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어린이와 성인에 대한 교육을 중시했고, 1년 내내 콘서트를 여는 전속 공연장이 세워졌다(클럽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중이 늘어났다. 알부크에르크는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구 약 50만명)라는 점이 중요하다. 뉴욕에서 재즈 콘서트가 다른 무수한 문화 행사들과 경쟁해야 하는 반면, 작은 도시에서 잘 조율된 콘서트는 훨씬 넓은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내 공상 속의 가상의 도시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한국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훌륭한 상영관을 발견할 수 있을 테지. 지원금을 넉넉히 받으면 감독이나 배우들을 초대할 수 있을 테고, 한국영화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구민회관에서 제공한다. 한국영화는 재미있으니까(잘 고르기만 하면), 작은 팬그룹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이 모든 행사를 꾸려야 할 텐데, 그렇다고 못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장애물이 있다.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나라에 배급 판권이 팔린 영화들만을 상영해야 한다(이 목록이 그다지 길지 않은 나라들도 많다). 극장 개봉을 위해서, 배급자가 자기들 나름의 상영 계획이 없다면 제작자와 따로 조율을 해야 할 것이다. 자막이 달린 프린트를 제때 수급하는 일은 끔찍이도 어려울 것이다. 이 모든 행사로 돈을 벌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알부크에르크에서의 재즈 역시 돈을 벌어주지는 않는다), 관련 회사들에 협력을 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이쯤 되면 갈피없이 내달리던 내 공상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이 생각의 논리적인 결론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슬퍼졌다. 영화는 재즈가 아니다. 적어도 극장 상영을 떠올리면, 복잡하게 얽힌 회사 전략들, 잘게 나누어진 시장과 프린트 배송 관련 문제들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관객 사이에 들어서 있다. 내 희망은, 영화가 모두 디지털로 배급되는 미래가 오면, 더이상 세계를 작은 독립적인 구역들로 나눌 필요가 없어질 때가 오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별 배급업자들이 사라지고 영화는 같은 날 세계의 영화관들에서 동시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극장들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으면 인터넷에서 예약을 하고 위성을 통해 디지털 신호를 받는다. 이 체계는 영화 극장 운영에 창의성과 혁신성을 더해줄 것이다. 그러면 뭔가 놀랄 만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번역 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