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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박물관 전시품 기증 릴레이 49]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보

<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5월9일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연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49번째는 부산국제영화제 조영정 프로그래머가 기증한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보입니다.

한국영화기술자협회는 1955년 한국 조명기술의 개척자이자 조명기사 계보에서 ‘오야지’(스승)라 불리는 김성춘이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김성춘은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혜화동 공과실습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미관, 단성사, 대정관 등에서 외국영화를 구경하며 ‘우리도 좀더 배워와 연구하면 만들 수 있을 텐데’라고 꿈을 품기 시작했다. 1919년 최초의 연쇄극이자 조선인 김도산이 연출한 <의리적 구투>를 ‘신나게’ 보고 나온 김성춘은 일본에 가서 영화를 배울 결심을 한다. 야구를 좋아했던 그가 우연히 뛰게 된 일본 야구단과의 시합을 인연으로 덴카쓰자(天勝座)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배우 수업을 받았고, 조선영화 발전을 위해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토의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의 조명부에 입사했다. 이후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 등에서 정식 조명기사로 활동했다. 김성춘은 1934년 귀국,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중요한 시기에 일본에서 조명 기재를 도입하고 인력을 양성해 조선영화기술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방한준 감독의 <살수차>(1935)에서는 제작, 기획, 각색, 조명의 일인다역을 맡으며 80kW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조명을 사용해 큰 화제가 되었다. 1937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조명부장을 맡았고 고해진, 함완섭, 이한찬 등의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1955년 발행한 한국기술자협회의 2호 회보에는 ‘유니바-살’과 ‘인봐-코-’(INVERCONE) 노출계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가이드가, 5호 회보에는 협회장 김성춘의 ‘민족문화발전의 분수령기인 을미년이 저무러지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영화과학 - 조명이론: 고등조명’ 편이 실려 있다. 김성춘은 이후 1961년 ‘한국영화제작공사’를 설립·운영했고 1962년 ‘한국영화인협회’ 초대 기술분과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의 작품성에 주목해 제작과 조명을 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