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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전복을 꿈꾸다
이화정 2008-08-20

8월22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제9회 멕시코영화제: 루이스 브뉘엘 특별전

1930년 파리의 한 극장. 루이스 브뉘엘이 연출한 <황금시대>의 첫 공개 시사는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파시즘과 지배계급의 위선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 모호하고 초현실적인 영화의 구조. 종교와 성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외설스런 장면을 연출한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은 곧 모순덩어리인 파리 지식인 사회에 가하는 쓴소리였다. 당혹스러움에 몸을 떨던 관객의 참을성이 바닥난 건 난잡한 파티에 참석하는 예수의 장면이 나오던 순간이었다. 뿔난 관객은 스크린에 산과 잉크를 던져 분노를 표출했고, 영화관은 곧 브뉘엘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욕설로 난장판이 됐다. 필름은 즉각 압수되었고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다. 살바도르 달리와 공동으로 각본을 쓴 데뷔작이자 초현실주의 대표작 <안달루시아의 개>로 충격을 안겨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브뉘엘만큼 기구한 바이오그래피를 가진 감독이 또 있을까. 지금이야 초현실주의 영화의 개척자이자, 스필버그와 히치콕이 인정한 최고의 아티스트로 평가받지만, 당시 기득권한테 브뉘엘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황금시대>의 소동 이후 내쫓기듯 파리를 떠나 고국 스페인으로 갔지만, 그곳 역시 설 자리는 없었다. 초현실주의자로서 그의 주제의식을 이어 만든 사회비판 다큐멘터리 <빵 없는 대지>(1932) 역시 상영금지되었고 무정부주의자, 변태, 성도착자 등 그를 향한 거친 수식어들을 확고히 다져주었다. 이 정도 스캔들리스트라면 작품 활동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고집쟁이 아티스트에게 타협은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편집과 더빙으로 연명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천착한 주제의식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발붙일 곳 없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브뉘엘은 당시 정치적인 탄압으로 멕시코행을 택했던 스페인 좌파 지식인들처럼 멕시코행을 감행한다. 그리고 근 20년간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연명했던 작가로서의 ‘침묵시위’는 멕시코 시절의 수작인 <잊혀진 사람들>(1950)에 의해 물꼬를 텄다. 대도시 외곽에 사는 일탈한 청소년의 황폐한 삶은 브뉘엘이 직접 쓴 시나리오와 편집으로 완성됐고, 날선 칼날처럼 매섭게 현실을 반영했다. 그가 스크린에 보여준 처연한 진실에 대해 앙드레 바쟁은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수식했고, 그해 칸은 최고의 영예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전세계 영화계는 브뉘엘에게 더이상 편견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멕시코는 작가 브뉘엘에게 해방구였고 스스로 칭했듯이 ‘제2의 조국’이었다.

8월22일부터 3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멕시코 시절 브뉘엘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9회 멕시코영화제: 루이스 브뉘엘 특별전’을 갖는다. 세상을 들썩이게 만든 초기작과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비롯해 60년대 파리에 거점을 두고 발표한 후기작에 비하면 덜 알려져 있지만, 이 시절 그가 연출한 20편 남짓의 작품들은 브뉘엘이 작가적인 시도를 지속할 수 있게 해준 교량 역할을 한 의미있는 작품들이다. 상영작은 <잊혀진 사람들>(1950)을 비롯해 총 6편. 삶의 기쁨과 사랑 등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멕시코에서 버스타기(승천)>(1952), 히치콕의 <현기증>에 비유되며 멕시코 시절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이상한 정열>(1952), 종교와 국가에 대한 풍자와 은유로 가득 찬 수작 <환상의 전차를 타고 여행하다>(1953), 후기작 <하녀의 일기>의 모태가 된 <범죄에 대한 수필(아르치발도 드 라 크루즈의 범죄 인생)>(1955), 부패한 멕시코 정권에서 퇴락하는 성직자의 모습을 그려 논쟁을 일으킨 <나자린>(1958)이다. 그의 연출 작품 중 어느 때보다 풍부한 풍자와 유머,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물론 그의 영화를 보는 일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관객에게도 여전히 편치 않은 경험이다. 당시 관객이 통렬한 비판으로 점철된 정치적 맥락 때문에 당혹스러워했다면, 지금의 관객은 보편화되고 안정된 영화의 구조와 내러티브를 무시한 브뉘엘 영화의 파격에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야말로 브뉘엘 영화의 진수다. 브뉘엘에게 영화는 끊임없이 파괴되고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 도전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래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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