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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정녕 오다였을까?
주성철 2008-08-29

올 여름 휴가는 하와이로 다녀왔다. 작열하는 태양에 새까맣게 탔던 피부는 이미 껍데기 2번 정도 깔끔하게 벗겨졌고 매일 저녁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카드값 결제의 공포도 지난달에 모두 끝났으니 정말 오래전의 기억이다. 6월이 시작하자마자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기자들 중 가장 먼저 다녀왔기 때문. 그런데 너무 오래전이라 요즘 다시 “휴가 언제 가요?”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언제 가긴 언제가, 내년에 간다 이 사람아.

이번 하와이 여행은 그냥 놀다 오는 휴양이 아니었다. 가끔 여행 기분에 젖어 나태해질 때도 있었지만 향후 <씨네21>의 편집방향을 가늠하게 할지도 모를 중요한 열쇠를 쥔 취재기행이라는 사실을 내내 되뇌었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 다른 기자들을 대표해서 온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언젠가 있을지 모를 <씨네21> 개편의 중요한 열쇠를 쥔 모색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향후 잡지의 주요 기획 아이템으로 떠오를 ‘영화 속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야심찬 기획으로 ‘오다’를 받아 떠났지만, 돌아오자마자 그 하와이 기행문은 모두의 비웃음 속에 레오네에게 차이고 두기봉에게 까이고 당룡과 왕호에게마저 싸대기 맞으며 사장됐다. 나는 분명 오다를 받아 떠났다고 믿었는데 다른 기자들은 그것은 나의 환상에 불과했다며 잠자코 빨리 프리뷰나 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는 많이 슬퍼서 다들 회의하고 있을 때 비디오 룸에서 엉엉 울었다.

정녕 ‘영화 속 촬영지’ 기행은 모두의 무관심 속에 그렇게 사라져야 하는가. 같은 기획 프로젝트를 가지고 비슷한 시기 홋카이도로 떠났던 전직 기자 오정연 역시 <러브레터>에 나온 후지이 이쓰키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를 수상히 여긴 마을 주민들의 뭇매를 맞았다니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게 개편이란 힘든 것이다. 그래도 아까운 건 사실이다. 지난해 휴가 때 시드니에 갔을 때는 구 우체국 건물에서 <다크 나이트>가 촬영 중이었다. 물론 본인이 심각한 ‘잉글리시 페이션트’인 관계로 접근조차 못했지만(아니었다 해도 철저히 통제됐겠지만), <다크 나이트>가 새겨진 촬영차 구경 정도는 하고 사진도 찍었다. 식당에서 게리 올드먼을 봤다고 말하는 일행도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홍콩은 또 어떤가. 영화를 수십번 돌려보며 화면을 캡처하던 가운데 <열혈남아>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의 롱 키스신이 벌어지던 공중전화 박스도 찾아냈다. 심지어 유덕화 인터뷰를 하며 자투리 시간에 그걸 물었더니 그 역시 거기가 맞다(!)고 했다. <도성타왕>에서 주성치가 원화에게 두들겨 맞던 란타우섬 타이오 마을의 너른 마당도 찾아냈다.

그러다 이번 하와이에서도 이른바 ‘<로스트> 투어’를 했다. 헐리가 골프를 치던 곳, 잭과 케이트가 첫 키스를 하던 곳, 고장 난 버스를 찾아 고쳐서 산 아래로 질주하던 곳 등 정말 힘들게 물어물어 내가 직접 다 찾아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돈만 내니까 촬영지에서 인접한 쿠알로아 목장에서 지프차로 다 데려다줬다. 어떤 투어를 할 건지는 그냥 알아서 정하면 된다. 심지어 운전기사가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에게 쫓기던 장면, <진주만>에서 폭격을 당하던 장면, <로스트>에서 잭이 벤자민과 함께 무전기로 해변가 사람들과 통화하는 장면까지 다 연출해서 사진도 찍어줬다. 기사 형태로 공개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은 관계로 일단 곧 블로그를 개설해 하나둘 사진을 풀 생각이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