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한국영화 후면비사
[한국영화 후면비사] “국익을 위해 희생해줘야겠수다”
이영진 2008-09-04

1965년, 베트남전 파병과 동시에 본보기 대상이 된 영화인들

“계장님 그냥 덮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는데요.” 일대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본 사복형사 김은 고개를 젓는다. 철대문을 지키고 있는 사나운 도사견 때문에 무데뽀식 급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거액의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서 서울 동선동5가 일대 골목에서 잠복한 지 벌써 나흘째. 2시간 전 4명의 남자들이 ‘하우스’에 들어가서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쯤 목울대에 핏대 세우며 한창 투전에 열을 올리고 있을 터인데. 우물쭈물하다가 다 잡은 고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성북경찰서 조OO 계장은 입술이 바짝 탔다. 1965년 1월16일 밤 11시45분. 노름꾼으로 위장한 뒤 “오늘도 한판 거하게 벌어졌다면서?”라고 식모를 속인 뒤 대문을 통과한 형사들은 곧바로 2층 구석방으로 달려 올라갔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말라”는 조 계장의 고함과 함께 증거 확보를 위한 카메라맨의 플래시가 ‘빠빠방 ’ 터졌다. 그리고 이튿날 조간신문들은 최무룡, 김지미 등 유명 배우가 포함된 5인조 마작 도박단이 검거됐다는 소식을 앞다투어 알렸다.

‘간밤에 무슨 변고 없었수?’ 1965년 충무로의 아침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호사가들은 액땜 굿이라도 한판 거하게 치러야 하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초부터 후덕한 인상의 김승호가 촬영 도중 공항 세관 출장소장에게 욕설을 퍼부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입건됐고, ‘액숀스타’ 박노식 또한 행인과 시비 끝에 주먹을 먹이는 사고를 냈다. <월하의 공동묘지>의 주인공 월향으로 훗날 기억되는 강미애는 괴한에게 납치됐다고 알려졌다가 남편과의 불화로 제발로 집을 나갔음이 드러나면서 체면을 구겼고, 최무룡, 김지미 도박 사건에 이어 이민자, 석금성 등도 대학교수 등 사회지도층과 어울려 도리짓고땡을 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이에 질세라 도금봉 또한 ‘보그 미장원’에서 여대생들과 노름을 하다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엄앵란도 시보레 등 외제승용차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관세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으며, 단성사 이남규 사장 또한 거액의 외화를 해외로 유출시켰다는 죄목으로 추궁을 받게 됐다. 김희갑 또한 자신에게 반말을 한 관객의 앞니를 부러뜨리는 완력을 과시하다 콩밥을 면치 못했다.

“영화 찍으려면 경찰서부터 찾아가야겠어. 배우들이 죄다 거기 있으니 말이야.” 심심하면 노름이요, 걸핏하면 폭력이요, 방심하면 뒷거래라. 영화인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면서, 충무로가 몰지각한 비행집단으로 꼽히게 된 까닭은 과연 뭘까. 죄지었으니 벌받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단순 잣대를 들이대진 말자. 극중 캐릭터에 몰입한 나머지 배우들의 준법의식이 잠시 멈춰섰거나, 세대 교체 물결에 밀려난 배우들의 실의가 도덕적 해이로 이어졌다고 동정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검찰의 말처럼 “자유당 정권 때부터 연예인들의 도박이 성행했다”면 검경은 왜 좀더 일찍 잡아들이지 않았을까. 의문은 또 있다. 김승호는 “인기배우로서 몸가짐에 특히 유의하고 겸손해야 함에도 외빈들을 영접하던 서울세관 김포출장소장에게 ‘이 새끼’라고 폭언을 했다”는 이유로 결국 징역 1년이라는 중형을 받았다. 상식의 눈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과도한 엄벌이었다.

어쨌든 충무로 탄압(?)이 이어지는 동안 학생들은 불순 서적 화형식 및 불순 영화 배격 운동을 펼쳤고, 정부는 <육체의 고백> <불량소녀 장미> <나도 연애할 수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등과 같은 ‘저속한’ 영화제목 또한 소년 범죄를 부추긴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정부가 여론을 조장하는 사이 영화계도 모른 척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 영화, 방송, 만화, 출판 등 각종 문화 관련 단체들은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해” 저속과 퇴폐를 자정하는 윤리위원회를 서둘러 만든다. 여기서 추측 하나. 1965년 베트남전쟁에 전투병 파병을 결정한 박정희 정권으로선 내부 단속이 필요했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바깥 싸움을 위해서 집안 단속이 필요했고, 전시(戰時)를 위한 전시(展示) 희생물이 요구됐다. 영화인들만큼 만만하고 효과적인 본보기는 없었다. 이만희 감독과 유현목 감독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도 바로 1965년 아니었던가. 을사년, 충무로의 해프닝은 그러니까 베트남전쟁에 “국가의 운명을 건”, 병영국가의 사전 긴급조치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