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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를 보니
2001-11-14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탈레반 정권이 맨 먼저 수행한 일의 하나는 텔레비전 사형이다. 압수한 티브이 수상기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탱크로 깔아뭉개는 ‘참살형’도 있었고 수상기들을 노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다는 ‘교수형’도 집행되었다고 한다(이 상징적 교수형 끝에 수상기들은 다시 끌어내려져 박살형에 처해진다). 음악은 금지되고,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들도 텔레비전과 운명을 같이한다. ‘이미지’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영상 이미지는 사람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순수 이슬람 국가’를 향한 탈레반의 열정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그리고 서구풍 대중문화나 서구 영향을 받았다고 판정되는 문화형식들에 대한 탈레반의 혐오가 얼마나 강도 높은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서구적인 것들만 수난당한 것은 아니다. 탈레반이 지난 봄 바미안 계곡의 7세기 석불들을 폭파한 것도 그들의 눈에는 석불이 ‘이슬람에 어긋나는’ 우상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금지된 그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들어가 그 땅의 현실을 이미지로 잡아낸 영화 한편이 지금 세계적 화제가 되고 있다. 이란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작품 <칸다하르>(Kandahar)가 그것이다. 마흐말바프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이란영화의 물결’을 일으킨 두 거장 중 하나이다. 그는 영화감독이면서 소설가, 대본작가, 극작가이고 그의 가족은 부인, 딸, 아들이 모두 감독인 ‘마흐말바프 영화인 집안’으로 유명하다. 그가 <칸다하르>를 완성한 것은 지난 2월이고, 이 작품이 유명해진 것은 9월11일의 뉴욕 참사 이후이다. 완성 이후 일곱달 동안 이렇다 할 주목도 받지 못하고 “별 중요성 없는 소재”를 다룬 영화로 먼지 속에 묻힐 뻔했던 작품이 졸지에 화제작이 된 것이다. 더구나 ‘칸다하르’는 탈레반 정권 지도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의 출신 지명이기도 하다. 감독이 테러사건을 예견했을 수는 없다. 그는 무엇 때문에, 무슨 동기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도 영화적 소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나라에 목숨 걸고 숨어들어 렌즈를 들이댄 것인가?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마흐말바프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탈레반은 ‘무지의 군대’이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재난의 정권’이다. 탈레반 집권 이후 5년간 60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난민 신세가 되어 나라 밖으로 탈출했고 국민 대다수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부르카’(burka, 장옷)로 가려야 하는 여자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모든 사회활동을 금지당한다. ‘어머니’와 ‘아내’만이 여성의 기능이다. 사내아이들도 80%가 학교엘 다니지 못한다. 마흐말바프가 <칸다하르>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 ‘진실’은 그가 무지의 군대라 부른 탈레반의 압제와 그 압제로 고통받는 아프간의 참상이다. 영화를 만들기 전 1년 동안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치밀하게 관찰했다고 한다. 이 관찰과 분석도 그의 인터넷 사이트(www.makhmalbaf.com)의 ‘영화’ 메뉴 <칸다하르> 방에 “석불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다. ‘작은 지식의 불꽃’으로 ‘인간 무지의 깊은 바다’를 비춰보려 했다는 것이 말하자면 그의 <칸다하르> 제작 동기이다.

극적 구성과 다큐멘터리를 섞은 <칸다하르>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시적 영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마흐말바프 사이트의 <칸다하르> 포토 갤러리에 떠 있는 첫 번째 이미지는 쿠란 경전(?)을 펴든 검정 부르카 차림의 두 여자와 그들 뒤로 푸른색, 갈색 부르카를 입고 서 있는 여자들을 보여주는데, 이 화면의 색조와 구성은 숨막히게 심미적이다. 부르카에 갇혀 숨막히는 아프간 여자들의 영화적 이미지가 이처럼 숨막히게 아름답다니, 에고, 이건 무슨 조화인고? 아프간의 비참한 현실을 기록했다는 <칸다하르>의 장면장면 이미지들은 어찌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가? 목발 군상의 장면까지도?

이런 숨막힘은 탈레반의 현실과 탈레반의 저항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분열의 진실이기도 하다. 남의 것 훔치면 손목을 잘라버리기 때문에 길에 빵을 내다놓아도 누구 하나 집어가지 않는다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이런 나라에서 ‘이슬람의 법’은 정신의 차원으로부터 그저 가혹하고 무서운 ‘형법’의 차원으로 주저앉는다. 우리가 탈레반의, 또는 이슬람의 저항을 이해하는 일과 탈레반의 원리주의적 황폐를 지적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