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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밟아라, 나는 살아있다!
2001-11-14

<론머맨>

왜, 왜 오지 않아.

<최종병기 그녀> 3권 중 치세

여기는 61병동,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지리한 병실에서 세끼 식사는 가장 큰 이벤트이기 때문에, 밥 때가 되면 열심히 기어나와 밥을 껌 취급하며 오랫동안 열렬하게 밍밍한 병원 식사를 열애한다. 역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꼼꼼히 이를 닦는다. (조금 더 있으면 치아에 닿는 순간의 칫솔모의 휘어지는 각도를 감각으로 계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다락방에 핀 꽃들>에서 캐시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아이들인 것이다!”라고 탄식했듯이 시간을 때우려고 열심히 씻어댄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온갖 종류의 <샘터> <가이드포스트> 등 병동에 놓여 있을 법한 ‘착한’ 책들 옆에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 새빨갛게 놓여 있다. <서재의 시체> <예고 살인>…. 여하튼 ××살인이 그득그득 위풍도 당당하다. 세상에, 연쇄살인범을 배출하려는 병동인 건가! 하필이면 밥 시간 전에 <양들의 침묵>을 읽는 바람에 다소 입맛이 저하해 하루의 가장 큰 이벤트가 밍밍하게 끝났다. 그리고 뇌파검사실로 간다. 머리가 벗겨진 늙수그레한 간호부 할아버지가 앞서서 나를 데려간다. 영화에서 본 뇌파검사는 뭔가 근사하던데, 그냥 하는 거라고는 눕혀 놓고 딱풀(!)로 전극을 머리에 통째로 붙이는 것이다! 검사의 선생님께 “이, 이거 딱풀이에요?” 하고 묻자 “아녜요, 크림이에요” 하고 대답했지만, 깡통에 든 것은 색깔, 냄새, 찐득거리는 것까지 정녕 초강력 딱풀 잇셀프가 아닌가.

순식간에 나는 처덕처덕 딱풀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론머맨이 된다. 꼼짝 못하고 누워서 내 뇌(그런 게 있기는 하던가…)가 무슨 궤적을 그릴지 조용히 기다린다(혹은 <레드문>의 아길라스 같은 꼴이 되어 뛰쳐나와서 “병원 사람들이여! 나를 경배하라!” 하고 외치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하였으나 뇌는 내 지루함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지 열심히 궤적만 그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따위의 기대를 한 자신에 대해 혹시 모르는 사이 전두엽을 절제당한 경험이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검사가 끝나자 아저씨가 내 머리와 전선을 각각 잡더니 확! 하고 뜯어낸다…. 내 꼴은 딱풀 위에 전극을 고정시켰던 거즈가 잔뜩 붙어 타르통에 빠졌다가 밀짚을 뒤집어쓴 디즈니 래빗 같은 괴상한 꼴이 된다. 게다가 잘 씻어지지도 않는다. 으악. 여전히 꾸덕꾸덕 살갗에서 굳어지는 딱풀! 론머맨. 전극 뜯긴 론머맨.

간호부 할아버지는 내가 머리를 씻어내기를 기다려 MRI/CT실로 데려간다. 병원은 왜 이다지도 넓은지. 대합실의 기침하는 꼬마, 응급실에서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는 남자, 중환자 대기실의 고개를 푹 숙인 소리없는 통곡을 모두 목도하며 할아버지를 잃을세라 처음 꽃놀이 온 꼬마처럼 열심히 따라간다. 간호부 할아버지는 기침하는 꼬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나를 MRI/CT실로 넘긴다. 신김치 보시기처럼 권태로운 얼굴에 넘겨진 나는 몸을 꽉 죄는 상자에 담겨 귀가 막히고 머리가 고정되어 겁을 먹는데, MRI 기계는 그 외양이 세탁소 세탁기의 거대한 확장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빨래가 이리저리 밀리고 밀리는 게 보이는 동그란 구멍 안으로 스르르 밀어넣어지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에서 관에 넣어져 소각로로 스르르 밀려들어가는 제임스 본드인 게다. 폐소공포증 때문에 덜덜 떨린다. 20분이 지나 나오고 나자 간호부 할아버지는 “MRI 기계가 방아소리처럼 시끄럽지?” 하고 말하고는 길을 앞장선다. 돌아가는 길에는 버거킹과 날으는풍선세트팡팡???과 팝콘 튀겨주는 기계가 나란하다. 언제부터 병원에 이런 게 생겼지?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아까 닦아낸 딱풀이 덜 떨어져 거즈 실밥이 대롱거린다. Thanksgiving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채 털이 덜 뜯긴 칠면조가 된 기분이 든다…. 이봐요! 이제 우리 모두 대신 토끼를 먹는 게 어때요! (분명 전두엽은 절제된 게다.)

오는 길에 또 피를 하나 가득 뽑히고, 할아버지는 이 벌판 같은 병원에서 복잡한 복도를 징하게 돌면서도 군데군데 《금지》라고 쓰여 있는 화재문(!)을 열어 이 골목 저 골목에 숨은 엘리베이터를 찾아내어 이 병동에 이르는 최단좌표를 서슴없이 그려내는 것이다. 저 능력! 아, 세월은 무서운 거다.

병실에 누웠다. 왜 이리 아플까, 왜 이리 아팠을까 근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오냐, 나는 론머맨이 될 터이다. 급격하고도 영구한 제2 세대의 형질변이가 일어나 기쁨으로 바뀌어버리는 사태는 없다손 치더라도 포메이토처럼 빨간 열매가 열릴지도. Who cares? 〈대항해시대〉에서 키를 서쪽에 고정시킨 뒤 대서양을 잡아타고 하염없이 기다리듯, 미증유의 젊음이란 언제 어느 곳에 닿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경험하지 못한 대륙을 만날지,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설지도. 물론 매리 셀레스트호가 되어 언제까지나 우울한 해안가를 방황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로 앞에 두고 끝내 황야를 떠도는 영혼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그런들 어떠리. 적어도 나는 살아 있다. 딱풀을 온 머리통에 처덕처덕 바른 꼴이라도, 적어도 살아 있다. 적어도! 그러므로 황야에서 숨을 거두어도 마지막까지 가나안을 향해 디딘 한 발자국에 만족하리라. 젖과 꿀에 발을 적시지 않으면 어떠랴.

얼마든지 흙을 던지려무나, 밟고 더 밟고 나를 네 웃기 위한 제물로 삼거라.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여태까지 그랬듯 맞고 있을 터이니, 하고 싶은 대로 짓밟고 썩혀 보아라. 나는 가진 자본이 슬픔밖에 가진 것이 없으니, 그것으로 씨를 뿌릴 테다.

밟아라. 그 슬픔의 침윤으로 굳어진 내 수맥에는 언젠가 다시 콸콸 수맥이 흐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맥탐지기를 들고 왔다갔다하지 않아도 내가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 그러면 푸석푸석한 나무껍질도 반질반질 윤이 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그리고 성공하면 언젠가 그대의 전화벨을 울리리. 온 세상까지는 필요없어. 오로지 그대의 전화벨을 울리리. 나는 론머맨이니까-.

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서식중. 정확한 거처 불명. 키워드는 와일드터키, 에반윌리엄스. <누가 뭐래도 버번은 007이라는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NEO_HEART_BREAKER@HOTMAIL.COM(하트브레이커는 <하트브레이커스>가 아니라 하트브레이커 ‘더 키드’ 숀마이클님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