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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여름을 보내며
장미 2008-10-10

이 세상에 봄, 여름, 가을, 겨울형 인간이 있다면 난 단연 여름형 인간이다. 잘 웃고, 잘 울고, 이성적이어야 할 상황에서 흥분하기 일쑤다. 애호의 리스트가 긴 만큼 무관심과 경멸의 리스트도 아찔하게 길다. “당신이 죽도록 좋아요”라는 고백을 못해 쩔쩔매는 여자들이 바보 같았고, “아무 거나”, “아무 데나”, “아무나”, 심지어 “잘 모르겠어요”를 남발하는 취향 없는 남자들이 한심했다. 내 입술이 “그저 그래요”보다 “예스” 아니면 “노”를 선호하듯이, 목덜미에 내리꽂히는 태양은 강렬한 게 좋았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거나 아예 사납게 구겨진 게 좋았고, 무엇보다 여름 기운, 골목 여기저기를 온통 헤집고 다닐 정도로 온몸을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그 에너지가 좋았다. 지금까지 여권에 도장 찍은 나라들은 인도, 타이, 홍콩, 브라질, 말레이시아, 호주, 미국(출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따뜻한 LA). 40도가 넘는 불볕더위, 동네 강아지들도 거동을 삼가고 모기조차 자취를 감춘 뜨거운 거리를 모자 없이 걷는 걸 즐겼으니 그야말로 타고난 여름 체질이랄까.

물론 모든 여름이 행복했던 건 아니다. 소중한 이와 다투거나 이별했던 여름, 불면증에 대기가 주홍색으로 빛나기까지 잠 못 이루던 여름도 있었다. 편집팀 S선배가 몇주간 병원에 입원했던 이번 여름이 딱 그랬다. 아니, 악당으로 따지자면 중간보스는 족히 될 만큼 힘겹고 부산한 여름이었다. 이걸 해결하자니 저기서 뭔가가 터졌고, 어떻게든 간신히 버텨내는 나날이 계속됐다. 일은 몰려들었고, 시간은 부족했다. 한 사람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까마득했다. 별책부록에, <넥스트 플러스>에, 데일리에, 마감을 정신없이 해치우면서도, 내 마음의 시곗바늘은 원망과 동요, 애착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갔다. 그 사이 셋이라 든든했던 동기가 둘로 줄었고, 싱싱하게 검을 줄만 알았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발견되는가 하면, 하도 담금질을 한 탓인지 촉촉했던 양심 역시 조금 질겨지고 버석해졌다. 마감으로 지샌 새벽. 뇌신경이 되엉켜 머릿속이 캄캄해지는 시간이 되면, 이걸 아등바등 붙잡고 있으면 뭘 해, 어차피 알아주지도 않을걸, 눈 질끈 감고 외면하고 싶었다. 하기야 어떤 불경한 생각을 한들 교정지를 움켜쥔 손은 멈추지 않았고, 잡지는 잘도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지만.

추석이 다 가도록 기세등등했던 더위가 물러가고, 여름도 어느새 저물었다. 누군가는 가을이 성큼 다가온 마당에 이런 이야기 새삼스레 꺼내는 저의가 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고생하면서 깨닫는다던가, 나 역시 이 여름을 지내며 한뼘 정도 성장한 것 같다는 따분한 교훈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낯간지럽긴 해도 조금 감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변하지 않아서 기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랄까. 내일 당장 천지가 들썩이지 않는 한 곧 닥칠 마감을 피해갈 수 없듯이, 곁눈질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단지 그곳에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이리저리 투덜거려도 가판대에 방금 깔린 따끈한 잡지를 보면 슬쩍 웃음이 번지고, 지난한 여름을 함께 견뎌낸 이들이 있어 행복하며, 아무리 격한 일을 겪어도 내 여름애호가 쉽게 변질되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