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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초
2001-11-15

<두근두근 메모리얼>

누구나 외롭다. 더이상은 혼자 있는 게 진력이 나고, 애인만 있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반한다.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된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작,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버릇, 무심코 등을 긁는 모습에 홀딱 넘어가 버린다. 그녀, 혹은 그도 동시에 나한테 반해버리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보다 안 그런 경우가 더 많다.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서, 아니면 그냥 철판 깔고 돌진해서 만날 계기를 만들면 일단은 성공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건 이제부터다.

영화는 로맨틱코미디면 무난할까? 식사는 역시 화려한 조명과 깔끔한 제복의 웨이터가 있는 곳이 좋은 걸까? 정장을 입으면 딱딱해 보일 테고, 청바지에 니트를 걸치고 나가면 성의없어 보일 텐데.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적당히 아는 척할까, 아니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게 나을까. 눈을 크게 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뭘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기뻐할지 가능하면 짧은 시간 동안 알아내야 한다.

사랑을 하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해간다. 그녀, 혹은 그의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온 그 사람과 나의 차이가 좁혀지기 전에는?

<두근두근 메모리얼>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중 가장 유명한 게임 중 하나다. 이 게임에는 활달한 스포츠 소녀, 콧대높은 인기 연예인, 안경낀 문학 소녀 등등 다양한 스타일의 여자들이 나온다. 원하는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녀의 취향에 걸맞게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한편, 빗발치는 질문을 적절한 대답으로 받아쳐야 한다. 어떤 소녀는 운동을 못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다른 소녀는 시험 성적에만 관심이 있다. 공통적인 건, 질문을 했을 때 자기 취향에 맞게 대답하지 않으면 곧장 돌아서 버린다는 것이다.

다행히 공략집이란 것이 있다. 게임에 나오는 모든 질문의 모범답안을 자세하게 설명해놓은 책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마우스 버튼을 꾹꾹 눌러주기만 하면 ‘전설의 나무’ 아래에서 고백을 받을 수 있다. 늦게 와서 오히려 화를 내는 얼굴에 대고 심한 소리라도 해주고 싶지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공포영화는 딱 질색이지만 너무 재미있었다고 감탄한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음악회, 수족관, 동물원에 가서 미소를 지으며 정말 즐거웠다고 속삭인다.

현실에도 공략집 비슷한 게 없지는 않다. 남자 앞에서 방귀뀌면 안 되고, 처음 만난 여자랑 해장국집은 피해야 한다. 소개팅 때 힙합차림인 여자는 100명 중 95명한테 딱지맞고, 그녀가 고른 영화를 보러 가서 코를 골아서는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다. 물론 게임과는 달리, 공략집을 충실히 따른다고 꼭 해피엔딩을 볼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조상의 음덕을 타고났는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맺어진다. 극히 초창기의 탐색기를 넘기면 종이로 만든 허수아비를 치워버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면을 쓰는 데 지쳐서, 아니면 능숙하지 못해서 진짜 얼굴을 내보이고, 서로에게 실망만 안은 채 헤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관계가 고착되면 가면을 벗고 상대가 변했다고 힐책한다.

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원하는 일은 전부 하는 게 사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그 사람에게 맞추면서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사랑은 아니다. 게임에서는 쉽게 원하는 엔딩을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엔딩을 보더라도 더이상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