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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위한 이중주
2001-11-15

<후르츠 바스켓>

한국에서는 3천원에서 1만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영화 비디오도 사보기보다 빌려보기를 좋아한다. 최근에 판매용 영상물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DVD타이틀도 2만5천원 이상 나가면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각 나라의 경제적 환경에 따라 비교 기준이 다를 수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영상소프트의 값이 높기로 가장 악명높은 나라 중 하나인 일본에서는 웬만한 영상소프트의 개당 가격이 5만∼20만원을 호가한다. 소득이 높고 마니아가 많은 나라라곤 하지만 한명이 살 수 있는 애니메이션 소프트의 수는 한정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정이다보니 소프트판매를 위한 여러 가지 판촉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그중 한 예가 ‘희소성’과 ‘특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초회 한정판’, ‘한정 생산판’이라는 문구다. ‘초회 한정판’은 초기에 구매한 사람들에게는 ‘포스터’나 ‘특전박스’, ‘전화카드’ 등 일반판과는 다른 특전을 부여하는 것이고(예전에는 보통 가격이 2∼3배였지만 최근에는 가격이 똑같은 경우도 종종 있다), ‘한정 생산판’은 정해진 기간 또는 수량만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어차피 판촉용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실제로 이러한 명칭이 붙은 소프트를 구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발매되는 애니메이션 소프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TV용 애니메이션은 거의 공짜로 볼 수 있는 매체에서 방영되고 쉽게 녹화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작품의 인기척도라는 시청률조차 전국이 아닌 특정지역 방송사에서만 방영하는 일본에서는 그 작품의 성공기준으로 채택하긴 힘들다. 일본에서 이른바 ‘성공’하는 애니메이션의 신호탄은 그 작품이 판매용소프트로 나오고 나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9월 발매된 TV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원작 다카야 나쓰키)의 첫 번째 DVD ‘초회 한정판’의 매진소식은 이 작품이 다음 마케팅 전개를 폭넓게 진행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의 원작만화 <후르츠 바스켓>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고아가 되었지만 꿋꿋하게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밝게 살아가는 소녀 혼다 도루(<들장미소녀 캔디> <소공녀>)의 이야기. 이성에게 안기면 12간지의 동물로 변신해버리는 저주에 걸린 ‘소마가문’(<란마1/2>)의 미형 캐릭터들(<세일러문> <최유기>)과 같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는다는 스토리나 캐릭터는 솔직히 식상하고 평범한 것이다(팬들한테 맞아죽을지도…).

하지만 이 작품의 강점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에 좋은 속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만화를 영상물로 만들어낼 때 웬만해선 그 원작의 묘미를 살려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스토리나 장면의 전개방식이 브라운관 방식하고는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체적으로 2∼4p 정도를 주기로 이야기의 템포를 끊으면서 스토리의 강약이 조절돼 있는데다가 영상으로 바뀌더라도 그 재미를 살릴 수 있는 ‘정점’적인 이미지나 사건을 적당한 시점에 배치해서 속도감과 흥미를 유발하는 애니메이션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바탕을 만들고 있다.

만화가는 만화만 잘 그리면 되고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만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들 생각할지 모르지만, 서로의 영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려와 이해는 어디에서나 필요한 ‘성공’ 요인일 것이다.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은 다이치 아키타로(대표작 <아이들의 장난감> <멋지다 마사루군>)는 사진학과를 나와 촬영일로 애니메이션을 시작하고 작화와 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도중에 가라오케 영상물을 제작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해왔던 모든 일들이 지금의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이다. 뛰어난 그래픽 기술이나 엄청난 자본, 광범위한 마케팅 같은 것은 그 다음 이야기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