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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인이 만난 `허우샤오시엔` 대만감독
2001-11-16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에 온 대만 감독 허우샤오셴(54)은 세계 평단에서 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작가로 꼽힌다. 지금까지 한국을 찾은 감독 가운데 최고의 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85년 <동년왕사>(베를린영화제 비평가상), 89년 <비정성시>(베니스〃 그랑프리), 93년 <희몽인생>(칸 심사위원상) 등 그의 영화들은 개인사에 가족사와 대만 현대사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끌어냈고, 멀리서 길게 찍는 유장한 화면은 아시아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이번 부산영화제에 들고온 <밀레니엄 맘보>는 대만의 젊은이들을 다루는 3부작의 첫번째 영화로, 카메라 이동이 잦아지고 테크노 음악이 깔리는 등 새로운 변화를 선보인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지난 12일 부산 서라벌 호텔에서 허우샤오셴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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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인 내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으면 나는 언제나 <비정성시>를 꼽아왔다. 이 영화는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무척 중요한 영화라고 본다. 만나서 영광이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 영화의 특징인 `롱숏'(멀리 찍기)에 대해 배우들이 연기를 못해서 사용했다고 말한 걸 봤다. 정말 그런지 믿기 힘들다.

허유샤오시엔 내 영화의 연기자는 실제 연기자가 아닌 주변 친구들이나 작가가 많다. 카메라를 가까이 대면 긴장한다. 멀리서 찍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간의 문제다. 내 영화는 과거사를 다룬다. 누구나 과거를 생각하면 안정되고 침착해지고, 또 아름답고 즐거운 면을 기억한다. 그래서 조금 멀리서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이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는데, 고향에는 가보았는지.

허우 광둥에서 태어나 4개월 만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96년에 영화 촬영장소 헌팅하러 한번 가봤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말은 물론 통하고, 음식도 어머니가 해준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달라져 있었다. 15살 가량의 소녀가 자전거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 가는데, 짐이 흐트려져 쏟아질 지경이었다. 소녀는 혼자 무척 고생하는데 옆에 있는 청소년들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서 짐을 다시 추려 줬더니 소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 커녕,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가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최근작 <밀레니엄 맘보>에서는 주제나 카메라 이동에 변화가 보인다. 그 변화의 저력이 놀랍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주제 면에서 <비정성시> 같은 시대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아시아 영화의 유산 가운데 정말 자랑할 수 있는 건 당신과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둘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우 나는 내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남들이 지겹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지겨워한다. 하나를 찍고나면 지겹다. 신선하고 색다름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같은 성격과 주제로 영화를 찍는 건 어렵다. 이전에는 과거를 찍어왔는데 이제는 현대를 찍어보자, 그게 <밀레니엄 맘보>이다.

이 98년작 <해상화>는 프랑스에서는 40만명이 봤는데, 대만에서는 관람객이 4만명도 안 됐다고 들었다. 작가주의 영화에 대해 자국의 관객들이 외면하고 외국에서 되레 반기는 현상은 한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타개책이 있을까.

허우 그건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야기 전달방식이 세밀하고 심화될수록 일반관객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현대 관객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보면서 간단한 줄거리와 그걸 알기 쉽게 말해주는 영화에 너무 익숙해졌다. 조금만 복잡해지면 피한다. 나는 빙산의 일각만 노출시켜서 전체를 이해하도록 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일반관객들은 지겨워 한다. 프랑스인들은 그런 지겨움에 무척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이 90년대 아시아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상당한 인기를 모았는데 지금은 시들해지고 있다. 아시아 영화의 선풍이 단지 서구 영화제들이 만든 하나의 유행인지, 아니면 세계영화의 한 유산으로 이어질 것인지 어떻게 보는가.

허우 서구에서 동아시아, 이란, 인도영화들이 환영받는다. 문화가 달라서 신선함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서구영화는 지나치게 개발이 많이 됐다. 그 상황에서 아시아 영화의 표현이나 주제 같은 게 신선했을 것이고, 신선하다는 느낌이 떨어지자 이제는 이란과 인도 영화에서 그걸 찾는 것 같다. 마치 소련이 무너진 뒤 동구권 영화가 유럽에서 크게 환영받다가 시들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이 대만의 에드워드 양이나 중국의 장이무, 홍콩의 왕자웨이의 영화를 어떻게 보는지. 또 그들과 연대감 같은 걸 느끼는가.

허우 다 같은 중국인이라고 해서 연대감을 느낄 만큼 감성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나는 이성적이다. 다만 감독들이 살아온 배경이 다른 만큼 영화도 다른 것 같다. 왕자웨이는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상하이는 식민지였고 산업이 발달했다. 장사꾼 기질이 많이 발달했는데, 그건 현대적인 것과 통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도시적이다. 장이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사상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또 그곳은 러시아 문화의 전통이 강하다. 대만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면이 강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영화가 또 다르다. 나더러 장이무나 왕자웨이 같은 영화를 찍으라면 죽어도 안된다. 전에 장이무 감독의 <홍등>의 제작을 내가 맡았을 때 장이무가 시나리오를 들고 와 토론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장이무가 보는 각도가 있을 것이고, 내가 보는 각도가 있을 것이다. 두 각도가 부딪치면 이도저도 안된다. 그러니 당신 방식대로 찍으라고 했다. <홍등>은 상당히 정치적이면서 무대적인 연출을 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안 맞는다.

이 같은 대만에서도 차이밍량의 표현방식은 또 다르다. 대만 영화가 세대별로 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그 속에서 어떤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건가.

허우 차이밍량은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으로 대학 때 대만으로 왔다. 그가 타이페이를 보는 각도는 당연히 일반 대만인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만든, 가족간의 동성애를 다룬 <하류> 같은 영화의 깊이와 심오함을 나는 담을 수가 없다. 나는 대만의 남부 시골에서 자랐다. 에드워드 양은 타이페이에서 자라서 영화도 상당히 도시화돼 있다.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감독은 자신의 성장배경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거다.

이 프랑스 사람들이 당신의 영화세계를 담아 만든 다큐멘타리를 봤는데 거기에서 당신은 “우리 사회에는 남자가 없다”는 말을 했다. 어떤 의미인가.

허우 남성성의 문제다. 남성성이 점점 중성화하고 있다. 특히 요즘 세대들은 더하다. 수컷의 본능이 줄어들고 있다. 나는 늙어서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남자는 약해지고 여자가 강해져서 남자들이 설 땅이 줄어들고 있다. 그에 대한 한탄이었다. 특히 가장 기분나쁜 건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남자들이 툭하면 울고, 정치인들도 거기 나와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울 시간 있으면 가서 일하라고 말하고 싶다.

부산/정리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