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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 ‘예쁘다’보다는 ‘연기 잘한다’고 해주세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송혜교

송혜교가 ‘산다’. 일이 안 풀리면 버럭 화도 내고, 남자친구가 헤어진 여자를 만나는가 싶으면 금세 삐치고, 사랑의 다가옴에 환하게 웃을 줄 알고 또 그 사랑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PD 주준영은 송혜교를 다사다난한 세상과 만나게 해준다. 송혜교에겐 혁명이다. <올인>의 수연이 지녔던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제로에 놓은 다음 <가을동화>의 은서에게서 보았던 과장된 슬픔을 살짝 걷어내고 <풀하우스>에서 <곰 세 마리>를 부르며 짓던 비현실적인 깜찍함을 과감히 털어내면 가까스로 주준영과의 접점이 생긴다. 영화 <파랑주의보>에서 보여준 비운의 수은이 될 필요도 없고, 슬픔을 억제한 <황진이>의 여성상을 제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주준영은 지금까지 송혜교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목선에 맞추어 싹둑 잘라버린 헤어스타일. 치장하지 않은 스포티한 차림. 노희경 작가, 표민수 PD와의 만남.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주준영’의 세상 속으로 성큼 들어간 그녀가 궁금했다.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닥친 변화를 브라운관이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대하고 싶은 마음이 증폭됐다. 성급함에 <그들이 사는 세상>의 촬영이 있던 여의도 별관 앞. 새벽부터 버스 촬영신을 찍고 나선 그녀를 불러 세웠다. “여름부터 촬영했으니까요. 전 바뀐지도 모르겠어요. 짧은 머리가 이젠 너무 익숙해요. 그래도 남자들은 이 머리 너무 싫어하던데요.” 물을 새 없이 시원하게 제 할 말을 맺는다. 첫 단어가 끝나기도 전 다음 단어가 찰싹 달라붙는 듯한 그녀의 화법. 이전까지 송혜교의 화법이라고 생각했던 그 빠른 말이 이젠 주준영의 것이 된 지 오래다. 그러고 보니 송혜교가 아닌 주준영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어 만나자마자 그녀를 금방이라도 다 알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생활의 대사로 말거는 그녀, 주준영

“이 작품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4년 전 <풀하우스>로 인연이 된 표민수 PD는 노희경 작가와 방송의 리얼한 세계를 보여줄 드라마를 구상하고 있었고 송혜교에게 그 주인공 역을 제안했다. 시청률 낮기로 유명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 그녀는 선뜻 응했다.

“언제까지고 백마 탄 왕자가 나오는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의 주준영은 송혜교를 염두에 둔 맞춤형 캐릭터다. <풀하우스>를 하면서 낯가림도 없어지고 한층 쾌활해진 그녀의 캐릭터와 그녀의 초기작 ‘<순풍산부인과>의 부작용’이라며 지적받아온 ‘잘 안 들린다’는 송혜교의 발음까지도 주준영의 바쁜 일상을 실감나게 해줄 재료로 빼놓지 않고 아낌없이 활용된다. 나문희, 윤여정, 김자옥, 김갑수, 김창완…. 단둘 혹은 넷이 주조가 되는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활용되던 그녀가 연기로 기량을 닦아온 선배들을 만났고, 그저 ‘예쁘게’ 보이는 대신 일상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됐다.

“너무 재밌어요. 생활의 대사를 하는 거예요. 그게 볼 때는 그냥 하면 되지 싶었는데 막상 하니까 너무 어렵더라고요.” 연기를 처음 배우는 배우처럼 달뜬 설렘이다. “선배님들이 그러세요. 난 이렇게 연기를 오래해도 여전히 힘든데 이제 28살인 너는 얼마나 힘들겠냐고. 그래도 즐기다보면 이 작품으로 훌쩍 성숙해진 모습을 발견할 거라고 인내를 가지라고 하세요.” 드라마로는 늘 ‘대박’이었던 그녀가 한 자릿수 시청률을 경험했고, 연기에 대한 가혹한 평가도 맞닥뜨렸다. “첫방 시청률 저만 맞혔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송혜교인데 하면서 높게 잡았는데, 제가 8.5% 나올 거라고 했어요. 만약 시청률 따졌으면 이 드라마 못했겠죠.”

터닝포인트, 송혜교는 이 단어가 맘에 들지 않는다. 송혜교라는 이름이 붙은 매 작품, 대단한 변신을, 대단한 욕심을 부린 기억이 없다. 주변의 해석이 어떻든 간에 그녀의 선택은 늘 ‘물 흐르듯, 느낀 대로’가 전부였다. <올인> 이후 방송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 그녀는 영화 <파랑주의보>로 덜컥 스크린을 택했고, 어린 송혜교의 ‘어른’을 담보했던 <황진이>는 소녀를 벗어나기 위한 강박이 아니라 스스로 성취감을 주고자 도전했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놔두는 게 몸에 뱄어요. 물론 저도 사람이니 계속 사랑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없진 않죠. 그런데 어릴 땐 그런 결과에 운운했다면 지금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영화의 잇단 흥행 부재에 대해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다. “저 이제 겨우 영화 두편 했어요. 망할 수도 있지 않나요. 배우로서 송혜교를 더 지켜봐줬으면 해요. 선배님들 봐도 작품 여럿 하다가 나중에 진가를 발휘하신 분들 많잖아요. 한번에 잘되는 게 오히려 문제있는 거 아니에요?” 이 배우의 항변에 진심이 묻어난다. 섹시하단 소리보다 인간성 좋다는 소리보다 연출 잘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은 <그들이 사는 세상>의 연출가 주준영처럼 ‘배우’ 송혜교는 지금 예쁘다는 소리보다는 중화권을 석권한 아시아의 톱스타라는 소리보다 그냥 ‘연기 잘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다.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부단한 노력과 내공이 필요한 일임을 배우생활 13년차의 그녀는 너무도 잘 안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예민해져요. 내 나이 정도 되면 그냥 연륜이 쌓일 줄 알았는데 알고 나니 더 무섭더라고요.”

첫 번째 톱 르로젝트, 오우삼의 <1949>

얼마 전 그녀는 손수범 감독의 할리우드영화 <시집>에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송혜교를 연기했다. 송혜교는 세습무당의 핏줄을 벗어나고자 한국을 등지고 미국 땅을 택한 여자 ‘숙희’의 삶을 그린다. 기존 이미지와 한참은 동떨어진 팜므파탈 캐릭터에 대해 송혜교는 “시나리오가 너무 맘에 들어서 2주 만에 결정하고, 2주 뒤에 뉴욕 가서 촬영했어요. 할리우드 진출이니 그런 거창한 걸 생각한 게 아닌 거죠”라고 일축한다. 스탭 모두가 NYU 영화과 출신. 모두 무보수였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은 여느 프로 못지않았다. “대기실도 따로 없을 정도로 현장이 열악했어요. 쉴 틈이 나면 그냥 거실에 드러누워 이야기 나누고 친구가 됐죠. 대사가 거의 영어라 주변 모두가 저에겐 선생님이었어요.” 딴 생각 없이 연기만 하기. 이 ‘값진 경험’에 억대 개런티의 송혜교 역시 기거할 아파트를 제공받는 ‘특혜’를 받는 걸 빼면 무보수로 임했다. 신기하게도 ‘작은 역할이라도 캐릭터가 좋다는 전제라면 기꺼이 출연하겠다’는 입에 바른 배우들의 ‘빈말’을 그녀는 정상의 자리에서 거리낌없이 실천하고 있다.

요즘 들어, 며칠 쉬다 촬영하고, 또 며칠 쉬다 촬영하느라 오히려 적응이 힘들다지만, 주준영의 옷을 입은 그녀는 편하고 여유있어 보인다. “좀 여유가 있어요. 주인공 둘만 초점이 되는 게 아니라 선배님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 다른 미니시리즈와 달리 중간에 쉬는 날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지만 그녀의 느린 행보에는 아랑곳없이 정작 중화권 제작자들에게 송혜교는 잡지 못하는 꿈의 스타다. 주변의 안달에 내내 느긋하던 그녀가 선택한 첫 번째 톱 프로젝트는 오우삼 감독의 <1949>다. 1949년, 격변의 세월을 사는 세 커플의 이야기에서 송혜교는 장첸과 짝을 이뤄 상하이에서 부유하게 살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대만으로 와 또 다른 인연을 맺는 청순한 여인을 연기한다. “감독님이 <황진이>를 보시고 캐스팅을 생각하셨대요. 슬픔을 절제하는 황진이가 한국적인 여성형이었다면, <1949>에서는 또 다른 여성적인 면모를 보여줄 것 같아요.” <그들이 사는 세상>의 촬영이 끝나는 한달 뒤, 그녀는 광고와 내년 초 촬영할 <1949>를 위한 현지 미팅, 중국어와 영어 특강에 들어간다.

“그래도 틈나면 뉴욕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싶어요. 예전엔 제가 어딜 혼자 가면 위태해 보이는지 주변에서 도와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전 혼자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아요.” 드라마의 요정, 한류스타의 후광이 벗겨진 그녀가 맑고 예쁘고 씩씩하다. 마치 <순풍산부인과>의 ‘혜교’의 철든 십년 뒤를 보는 듯 편하고 멋지다. “제가 원래 그래요. 작품 시작할 땐 ‘송혜교’인데 하다보면 서서히 그 인물이 되죠. 지금 주준영이니까, 조금 터프하죠?” 카페를 나서며 마지막 한마디도 잊지 않고 챙긴다. “아무래도 연기하기 잘한 거 같아요. 남들 공부할 때 안 하고 계속 연기만 했으니까요. 지금 잘할 수 있는 거, 제가 정말 잘하고 싶은 건 연기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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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최혜련·메이크업 알트앤 노이 전미연·헤어 뮤제네프 유미·의상협찬 GAP, 수콤마보니·장소협찬 SMILE FLOWER & CAFE, 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