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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아버지의 삭발
강병진 2008-12-19

아버지가 삭발을 하셨다. 밤 늦게 집에 들어왔더니 낯선 뒷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랐다. 나는 “왜 삭발을 하셨냐”고 묻지 못했다. 대신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중학생 시절의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덥다는 이유로 머리를 짧게 자르신 적은 있었지만 삭발은 처음이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 아닌가. 삭발의 이유보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버지는 머리가 아프셨다고 했다. 머리에 점점 열이 나는 것 같았다고 하셨다. 열이 나서 머리가 더 아픈 것 같았다고 덧붙이셨다.

아버지는 이미 올해 초 나를 크게 놀라게 하셨다. 2월의 어느 목요일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갔다고 알리셨다. 심근경색이었다. 아버지의 심장에 있는 혈관들은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마냥 군데군데가 묶여 있는 듯 보였다. 다행히 심장의 어느 혈관에 작은 관을 삽입하는 정도의 시술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제 아버지의 몸은 더이상 아버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끼니때마다 찾으시는 얼큰한 국물도 못 드시고, 이것저것 좋은 약은 다 찾아다니시는 것도 못하시고, 가끔씩 드셨던 술도 못 마시는 아버지로 변신했다. 이제 더이상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삭발이라니. 짜증이 좀 났다.

아버지딴에는 나름의 치료였을 것이다. 특별히 병이 있으신 건 아니다. 대머리가 될 조짐이 많으신 것도 아니다. 다만 머리가 아프신데, 혹시 삭발을 하면 좀 덜 아플까 싶으셨을 거다. 퇴임을 하신 터라 어차피 사람 만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패션에 신경 쓰는 분도 아니니 삭발을 하는 데 큰 결심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나는 계속 그럴 거라고 반복해서 생각했다. 사실 나를 향한 위로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자꾸만 별일처럼 느껴졌다. 삭발이 뭐 대수인가. 아버지가 G-드래곤 머리를 하신 건 아니지 않나. 추운 겨울에 맨머리로 다니시는 것도 아니고 모자도 쓰신다. 누구에게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있어서 안될 일도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도, 자꾸만, 짜증이 났다. 마치 아버지의 맨머리가 나에게 말을 거는 듯 보였다. 한때는 흰 머리를 감추시겠다고 염색도 하셨는데. 퇴임 뒤 일을 하지 않아도 매일 단정히 빗으시던 머리였는데.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두통이 신경쓰이자, 괘념치 않고 삭발을 하셨던 거다. 나에게 이 퍼포먼스는 일종의 포기선언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라는 직함을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한 남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을 욕구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행동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제는 다른 것보다도 자신의 아픔을 먼저 돌볼 수밖에 없는 나이라는 걸 알리는 신호 같았다.

이쯤 되면 부모님을 잘 돌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게 좋은 모양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그런 건 없다. 여전히 나는 일을 핑계로 늦은 퇴근을 하고, 술을 마시고는 새벽녘에 집을 찾는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올려드린 것도 아니다. 머리가 아프시면 병원을 가보시라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 ‘아빠 힘내세요!’라고 응원을 할 리도 만무하다. 다만 앞으로 아버지의 몸이 드러낼 또 다른 신호들이 걱정은 된다.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몸에서는 파란불보다는 빨간불이 더 많이 켜질 것이다. 난 언제쯤 브레이크를 밟으려는지. 지금 아버지의 머리에는 흰 머리카락만 돋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