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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MB냐 관료주의냐

지난번 이 지면에서 노빠들에게 무지막지한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와는 별도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나 이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나라당엔 ‘잃어버린 10년’, 민주당엔 ‘배신의 세월’, 좌파들엔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 그리고 노빠들에겐 ‘수구세력의 딴죽’으로 기록될 이 시대의 특질을 나는 투박하게나마 관료주의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본다. 참여정부는 노빠들이 강조하다시피 시장권력과 언론권력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탄핵열풍으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원칙없이 분열했다. 그런 환경에서 참여정부는 관료들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난히 공무원이 유능한 집단임을 강조했고, 공무원 수도 꾸준히 늘렸다. 실제로 참여정부는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관료들의 나라’였다. 개혁적 지향을 지녔던 정치인이나 학자들은 관료들의 욕조에 뿌려진 찻잔 분량의 액체처럼 소신을 바꾸고 동화되거나 기름처럼 둥둥 떠서 권력의 상층에서 고립되었다.

노빠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참여정부의 고난은 각 권력주체들의 ‘방해’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수구세력’을 타격하는 것이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다. 그 투쟁을 위한 현실적인 힘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좌파들을 배격한다. 그리고 그 ‘배격’에 반발하는 행동을 책상물림이나 자기기만의 발로로 치부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런 사정은 흔히 노빠들이 하는 말인 “좌파들이 정권을 잡는다 한들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으냐?”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지나치게 강력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건 그 ‘방해’가 세력싸움의 레벨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관료들이 내세우는 리얼리티를 받아들이면서도 정책적으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집단이 육성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의 압력을 통해 관료들 내부에서도 국가를 운영하는 다른 방법이 있음을 자인하고 또한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생기지 않는다면, ‘대한민국호’의 항로는 수정되기가 매우 어렵다. 즉, 지금 상황에서 한국사회를 바꿀 수 없는 건 좌파들만이 아닌 것이다.

좌파들한테 “현실성을 갖추라”는 요구를 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그것이 진보대연합이나 반MB연대 동참 등의 정치공학적인 요구로 수렴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런 요구는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시사IN>의 보도에 따르면, 2004년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당시 꿈에 부풀어 박봉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왔던 수많은 정책연구원들이 NL세력의 전횡과 그 이후 분당 국면에 실망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어느 쪽도 택하지 않고 정치권을 떠났다고 한다. 문제는 정치공학의 허술함이나 상상력의 부재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를 보라. 그들은 관료들의 노련함도 활용하지 못한다. 이 시대에 ‘반MB투쟁’의 최대치는 이명박 정부를 관료주의로 되돌리는 것 정도다. ‘이명박과 관료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두개의 선택지다. 그리고 이 양자택일의 선택지는 한번의 결단으로 벗어날 수 없는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노무현에 대한 향수는 이 노력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각되는 것이며, 좌파들 역시 그러한 노력을 요구받아야 한다. 아마도 그 노력의 결과에 진보정당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