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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토정비결 넉다운
최성열 2008-12-26

2008년도 마지막 한달이 간다. 그래서일까 왠지 시작과 끝을 얘기 안 할 수가 없다. 특히 올 한해 나에게 시작과 끝은 의미가 남다르다.

연초 어딘가에서 본 토정비결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원래 이런 정해진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래도 재미삼아 앞으로의 일을 알아보는 건 반기는 편이다.

올해 나의 정해져 있다는 그 운명은 한마디로 XXX가 들어간 단어들만 연발할 만큼 좋지 아니했다. 회사는 절대 옮기면 안되고(당시 다니던 회사는 정말 맘에 안 들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있는 듯 없는 듯 일 벌이지 말고 하던 일만 충실히 해라 등. 수도 없이 좋지 아니한 일들만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말 현실에서 그놈의 악재들이 하나둘 벌어졌다. 1년 전 오픈한 사이트가 힘들어지고 선배들도 하나둘 나가게 되고 한마디로 일할 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흠씬 두드려맞은 빨래처럼 축 처진 어깨로 한해를 시작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일이 재미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을 시작한 지 아주 오래된 건 아니지만 슬럼프랄까. 여튼 아주 괴로운 한해의 시작이었다. 아마 그렇게 5개월 정도를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 인간이다. 또한 내 모토는 즐겁게 무조건 즐겁게다. 이렇게 지루하게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뭐 잘 안돼서 바닥을 치면 기어오르면 되는 거지 이미 바닥도 여러 번 쳐봤는데 퉤퉤퉤 일단 침부터 뱉고 토정비결에서 말했던 내 운과는 정반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기에 회사를 시원하게 나와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프리랜서를 시작하게 됐다. 물론 운명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안감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이 잘되고 안되고 앞뒤 계산없이 시작한 프리랜서였지만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안겨주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에 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한번 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고 그만큼의 경험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 천성이 사람을 좋아라 하고 잘 믿지만 프리랜서를 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람들과 더욱 돈독해진 나의 지인들. 나에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생겼다. 그리고 한해를 규정지었던 내 토정비결은 지금으로부터 한달 전 더욱 보기 좋게 KO패를 당했다.

<씨네21> 면접을 보기 위해 한참 동안 포트폴리오를 고르고 또 골랐다. 아마 3박4일은 사진만 들여다보고 선별했던 것 같다. 입사지원서 쓰기도 만만치 않았다. 지우고 고치고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여러 번 땀흘려서일까. 지금 사무실 책상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지금도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여튼 두드려맞은 빨래처럼 축 처져 시작했던 한해와는 달리 빨래는 이미 잘 말라 다림질까지 마친 상태가 된 것이다. 아마 <씨네21>에서 시작될 2009년 나의 운명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괘념치 말자. 안 좋으면 또다시 날려버리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