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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니콜 키드먼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이 버지니아 울프 역을 연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 ‘그럴싸한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키드먼은 훌륭한 배우니까 <세월>이나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을 쓴 거장의 삶을 깊이있게 그려내 아카데미상을 탈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는 건 아니에요. 전 키드먼이 울프의 다른 면을 잘 그려낼 거라고 봤습니다. 자신감 결여, 어린아이와도 같은 유치함, 지배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하녀나 일꾼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서투름, 은근히 깊은 속물 근성. 이런 건 정말 키드먼이 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체질이죠. <디 아워스>에서 키드먼이 연기했던 건 고뇌하는 고전 작가의 전기였고 그걸 썩 잘해서 아카데미상도 받았지만 전 키드먼이 제가 상상했던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가끔 상상하곤 해요.

키드먼에겐 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0년 넘게 할리우드 스타로 활약해왔어요. 굵직굵직한 작품도 많았고 스캔들도 화려하고 아카데미상도 한번 탔으며 경력은 지금 최고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단 한번도 진짜 할리우드 스타처럼 행동한 적이 없어요. 겸손하다거나 사람이 소탈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냥 할리우드 스타 같지 않아요. 할리우드 스타를 흉내내는 보통 사람 같지요. 인터뷰를 하거나 DVD 코멘터리를 하는 걸 보면 키드먼은 늘 바짝 긴장해 있습니다. 예상 질문에 대해 꼼꼼하게 복습하고 같이 공연한 배우들을 친절하게 배려도 하고 기자들에게도 예의바르지만, 이 모든 건 일종의 연기죠. 이런 경우를 너무 자주 봐서, 종종 이 연기를 벗겨내면 키드먼이라는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렇지는 않겠죠. 단지 끝끝내 쇼비즈니스계의 생리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을 뿐이지.

니콜 키드먼의 직업적 연기도 그런 구석이 있습니다. 모든 연기가 다 연기 같지요. 키드먼은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닙니다. 키드먼의 연기가 제대로 살아남으려면 인공적인 화려함이나 과장된 드라마가 더해져야 합니다. 특별한 분장이 더해져도 괜찮아요. 전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의 가짜 코가 좋았습니다. 그 코는 니콜 키드먼을 못생기게 만든 게 아니라 연기를 더 풍부하게 했어요. <물랑루즈>의 신경질적인 인공 세계나 <디 아더스>의 귀신 세계 역시 키드먼에게는 이상적이었어요. 그런 세계에서 키드먼은 과장된 큰 붓 그리기로 캐릭터를 근사하게 그려냈습니다. <디 아더스>의 경우는 배우 특유의 신경질적인 매너리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기도 했지요.

이런 건 모두 조절함에 따라 좋은 할리우드 스타의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배우로서 키드먼은 많은 걸 성취했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이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없으며 혼자만의 길을 걷는 데 주저합니다. 키드먼의 경력에 리메이크가 그렇게 많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 있지 않은 거예요. 그 때문에 키드먼은 종종 캐릭터를 연기할 때 지나치게 힘을 주고 그 때문에 기술적으로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역할도 종종 망쳐버립니다. 배우로서 훨씬 위태로운 길을 걸어왔지만 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잃지 않는 단짝 친구 나오미 왓츠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 분명히 느껴지지요.

67년생이니, 이 사람은 벌써 마흔이 넘었습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슬슬 다음 단계를 고려해야 할 나이가 된 거죠. 젊고 예쁜 애들에게 주연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좀더 성숙한 어른의 역할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신작을 보면 여전히 그 사람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젊은이로 남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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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임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