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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은의 돈워리 비해피] 믿거나 말거나, 의자 이야기
최보은 2009-01-16

죽지 않은 그 나무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했다오

3년 전, 2005년 12월 어느 날. 나는 누가 들으면 면전에서는 너 미쳤니라고 묻고, 돌아서자마자 쟤 미쳤어라고 할 게 분명해서 절대로 말하지 못할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다. 보고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해서 기독교 선교사인 언니가 30년간 전도를 했음에도, 살아 있는 예수를 내 앞에 데려오라고 코웃음쳤던 내게 전혀 일어날 만한 일이 아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 연말도 되고 해서, 믿거나 말거나, 재미삼아 소재 채택료도 안 받고 털어놓을 참인데, 절대로 방송국에 전화번호가 알려지지 않기를 빈다.

무대는 지방 소도시. 때는 평일 오후. 어느 한적한 골목길 앞을 지나치는데, 갑자기 “나를 데려가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울대를 통해서 울려나온 그런 소리가 아니었는데, 나는 들었다. 세상에는 인간의 말만 아니라 무수한 언어가 있고, 인간에게 그런 언어를 들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빈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사람은 한명도 없고,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오래됐지만, 아주 세련된 디자인의, 어느 부잣집에서 버렸을 것이 분명한 멋진 의자였다.

버려진 지 며칠 됐는지 흙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걸 빼곤 멀쩡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 “아, 키 큰 나무였겠구나, 너는”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아마존에서 왔니, 보르네오 숲에서 왔니, 아니면 시베리아에서 온 거니. 내가 나무에 대해 잘 알았다면, 아마 출신지까지 밝혀낼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갑자기 어떻게 된 건가, 싶은 어리둥절 중에 의자를 들고 정신없이 집에 왔다. 그리고는 마치 그 나무를 유모삼아 자라난 숲속의 아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이제라도 빚을 갚으려 허둥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걸레를 빨아 의자의 등받이며 다리에 묻은 흙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닦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싶은데, 또 그 언어가 들리는 것이다. “내 친구도 데려다주세요.” 나는 또다시, 그게 무슨 말뜻인지 어리둥절 속에 알아차렸다. 친구가 있었구나. 그 골목에 다시 가보아야겠다. 걸레를 손에 든 채로, 다시 그 골목으로 갔더니, 키큰 전봇대 뒤에 아마 고급 원목식탁에 아까의 의자와 나란히 놓여 있었을 것이 분명한, 쌍둥이 모양의 의자가 숨어 있었다. 이번 의자는 등받이의 버팀목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아마, 이 의자 때문에 먼저 의자도 같이 버려졌던 것이리라. 순식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너희 둘, 아니 그 이상의 의자는 같은 원시림 속에서 태어나 같이 자랐겠구나. 같은 바람과 희롱하고 같이 비를 맞고, 같은 새소리를 들었겠구나. 아, 너희들은 나무였구나. 살아 있었고, 지금도 살아 있구나. 지금은 단지 의자의 모양을 하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뿐이구나.

한날한시에 기계톱에 잘려, 머나먼 한국 땅의 어느 제재소로 실려와서 다른 톱질을 당한 다음, 가구점에 넘겨져 거기서 또다시 자잘한 톱질과 못질을 당했겠구나.

이 경험을 한 뒤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아는 사람만 알고, 그 밖에는 온 세상이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온 세상이 나를 몰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몰라야, 요 지면에 털어놓을 이야기가 많아지니까. (그런데 왜 Don’t Worry Be Happy냐고? To Be Continued잖아여~~.)

최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름이 그저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가 무슨 청산선사나 성철스님과 도반쯤 되는 듯 설치다가, 지금은 쥐띠답게 어느 시골집에서 조용히 바스락거리며 살고 있음. 더이상 알려고 하시지 말 것. 실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