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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가세 료를 벼르며
이화정 2009-02-06

“스미마셍.” 얼마 전 서울 강남의 도산사거리를 걷는데 한 일본인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돌아보니 사방이 일본 아줌마들이다. 배용준이 운영하는 카페 고릴라를 찾는다고 했다. 요즘 압구정, 청담동, 대학로 등 서울 곳곳 어디에나 일본 아줌마들이 출몰한다. 욘사마의 영향이 막대했다. 배용준 전용 미용실 앞에서 줄서기, <겨울연가>에서 욘사마가 다니던 중앙고등학교 거닐기, 욘사마가 담배피우던 담벼락에서 기념촬영하기, 욘사마 기념관 투어하기…. 최근 윤석호 PD 결혼식이라는 ‘대박행사’까지 겹쳐 서울 사는 나도 생전 갈 일 없는 청담2동 성당이 깜짝 한류명소가 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좀 우스꽝스러운 시선으로 일본 아줌마들의 하루 코스를 늘어놓다보니 어째 낯설지가 않다. 나 역시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를 보고 감동받은 뒤 도쿄에 가서 영화 속 아사노 다다노부의 책방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수백개도 넘는 고서점이 즐비한 짐보초에서 되지도 않는 일본어를 쓰며 설명하기를 30여분, 마침내 영화에 등장한 세이신도 서점을 찾았고 책방 주인아줌마와 짧은 대화도 시도했다. 아사노 다다노부가 앉았다는 낡은 스툴에 감탄하고, 아줌마의 휴대폰 카메라에 저장된 영화에 출연한 개 ‘므똥’의 사진을 보고 박수를 치고, “아사노상 한싸무데쓰”(아사노는 핸섬하다)를 연발하는 아줌마와 급조된 동지애를 나누었다. 그리고 휴무 중인 영화 속 공간 ‘커피 에리카’에 가서 기념촬영을 하고, 식당 ‘이모야’에 가서 덮밥을 주문해 먹었다. 이 모든 게 하나의 의식처럼 차근차근 진지하게 진행됐다.

한참을 지나고 돌아보니 그곳에서의 기억은 내게 <카페 뤼미에르>도 배우 아사노도 아닌, 아사노가 앉았다는 의자를 가리키며 친절하게 기념촬영에 응해준 서점 주인아줌마로 남아 있었다. 내 기억 속 짐보초는 아주 특별한 도쿄여행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금의 일본 아줌마들의 극성스러운 욘사마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들을 희화화하는 한국 사람들과 바가지요금을 적용하는 상인들이라는 ‘불순물’이 증류되고 나면 그들 역시 온전하게 서울의 동대문을, 삼청동을, 대학로를 서울여행의 기억으로 저장하고 있을 것이다.

미친 환율이 안정되면 이번엔 가세 료 숨은그림찾기나 해야겠다. 도쿄에 가서 가세가 다니는 미용실 앞에서 죽치고 있다가, 가세 기획사에 가서 기념촬영도 하고, 가세가 나오는 촬영지 투어도 하는 극성 한국 여성이 되어야겠다. 먼 훗날 가세라는 배우가 증발된 뒤 남을 또 하나의 특별한 도쿄 여행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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