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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저] 박찬욱 선배의 그, 그것마저…
사진 윤운식(한겨레 기자) 2009-02-13

이경미의 ‘약물 중독증’

지난 연말, <씨네21>로부터 ‘길티플레저’ 코너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며 거듭 거절했다. 도대체 저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일까요? 제게는 ‘길티플레저’가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 너무 평범하고 정말 별로예요. 이런 내용의 거절 통화 중인 내 얼굴은 이미 새빨개져 있었다. 내게 왜 길티플레저가 없겠어?! 나도 사람인데! 그렇지만 내가 나의 길티플레저라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음… 실은… 가끔 심심할 때면 헤어진 남자친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곤 해요. 아니, 그러다가 실은 헤어진 남자친구의 현재 여자친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기도 하죠. 아니, 그런 짓을 하다보면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전(前前) 여자친구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보는 일도 생기는데, 그러다 ‘파도타기’를 시작하면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전 여자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남자친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게 되기도 하고, 뭐 이렇게 자꾸 막 그러다보면, 세상에!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전 여자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남자친구의 절친 여자애가 내 동생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인 경우도 있더라고요?!!!’ 뭐… 이런 이야기…? … 나도 안단 말이에욧! 정말 재미있는 길티플레저를 늘어놓으려면 내가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하튼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실은 등줄기에 식은땀마저 흘리며 최선을 다해 거절했건만 2, 3주나 지났을까. 그새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연락이 왔다. <씨네21>로부터의 ‘길티플레저’! 내가 <미쓰 홍당무>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 내겐 일종의 약물중독증세가 있었다. 나의 약물중독증세는 ‘건강’에 좋다는 약이면 무조건 먹고 보는 무식한 증세였는데 심할 때는 하루에 13가지 이상의 약과 건강보조제를 복용한 적도 있다. 심지어 어떤 약물이 ‘건강’에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즉각 ‘정말 맛있구나’라고 느꼈고, 진심으로 그 약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다져져, 그것을 섭취한 뒤 몸에 이상반응이 오면 명현현상이라고 자가진단한 뒤 더 많이 먹었다….

당시 건강에 좋다면 똥이라도 먹을 태세였던 증세는 바로 내 처지에서 비롯된 자기방어 기제였다고 자가 평가한다. 끝도 안 보이는 시나리오 작업, 글은 좋아지지 않고, 내가 봐도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인데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입봉은 할 수 있을지 갑갑 오리무중이니, 건강마저 나빠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요가학원에서도 나는 전설적인 원생이었다. 요가를 뼈가 부러질 정도로 열심히 하는데다가 그 성과가 무척 급진적이라는 점 때문이었는데(아, 부끄럽다. 요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게 건강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요령이라고 느꼈나보다. 이런 요령은 눈에 보이는 좋은 약이라면 닥치는 대로 섭취하는 이상증세를 가져왔고 심지어 남의 약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많이 훔쳐 먹었다. 어머니의 칼슘제나 아버지의 자양강장제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허약했던 동생의 ‘체질개선을 위한 맞춤 프로젝트’로 동생의 체질에 맞게 특별 조제된 11가지 종류의 각종 의약품, 건강보조제 등을 ‘허약한’ 동생 몰래 훔쳐 먹었는데 그것도 각 제품의 성향에 맞게 꼬박꼬박 제대로 훔쳐 먹었다.

하루에 12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던 내 증상은 <미쓰 홍당무>의 투자가 확정되면서 잠시 사라졌다. 너무 바빠서. 그러나 허전하고 불안했다. 내가 요즘 건강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미쓰 홍당무> 촬영 중이던 어느 날 공효진양이 자기 어머니가 드시는 약이라며 ‘피부질환 치료제’를 갖다주었다. 습진, 두드러기, 피부발진 등등에 좋은 약인데 나와는 ‘절대 무관’한 그것을… 종합비타민제 챙기듯 복용하기 시작했다. 괜찮았을까? 당연히 안 괜찮았지. 피부발진과 습진이 생겼다! 여하튼 웬만한 성인은 한번쯤 다 해봤다는 ‘서점에서 책 훔치기’도 못 해본 내가 약물에 관련해서만큼은 어찌나 담대했던지 이제 와서 고백할 한 가지가 있다.

박찬욱 감독님, 제가 한동안 제 방을 두고 감독님 방에서 시나리오 작업한 적 있잖아요. 저 때문에 감독님은 몇주간 방을 잃으셔서 출근하시면 복도를 서성이다 다른 직원 방에 들어가 일을 보곤 하셨죠. 감독님 방에서 시나리오가 발동 걸리니 제 방으로 옮기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때 우리 시나리오 성과도 좋았잖아요, 감독니임~ 전 그 시간 동안 감독님 책상의 그 어떤 물건도 절대로 손대지 않았어요. 저기… 책장 하단에 있던 ‘통마늘 엑기스’만 빼고….

이경미 영화감독. 2004년작 <잘돼가? 무엇이든>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친절한 금자씨>의 스크립터로 참여했다. 첫 장편 <미쓰 홍당무>로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강점은 캐릭터와 디테일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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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