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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중산층 피터팬을 부탁해

여행과 술을 통해 제도 안으로의 귀환 미루는 청년들의 이야기 <낮술>

<낮술>을 지지하는 자들은 대개 두 가지 견해를 나눈다. 하나는 서사적 흡입력이 영화적 결함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뛰어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독립영화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감독 혼자서 각본, 연출, 편집, 음악, 미술을 다 해냈으며, 조명이 없어서 낮에만 촬영을 했고 심지어 기술적 미숙함으로 포커스조차 맞추지 못했다는 고백은 <낮술>의 영화적 취약성에 대한 비평으로 이어지는 대신, 호기로운 감독의 호기로운 서사를 강조하는 데 오히려 효과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무튼 위의 두 논지가 흥미로운 건 이들이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의 지점을 거꾸로 지시하기 때문인데, <낮술>에 대한 관심의 급증은 이 영화가 그 양쪽의 불만을 적절한 수준에서 충족시켜주는 데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전자의 견해는 자본으로 무장하고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일련의 상업영화들이 서사적으로 실패해온 데 대한 반감을 반영하는 것이고, 후자의 견해는 이제는 식상해진 ‘독립영화식’ 화법을 고수하며 관객과의 소통을 등한시하는 독립영화들에 대한 전형적인 반감을 골조로 한다. 나는 앞의 반응에는 수긍하는 편이지만, <낮술>의 미덕을 기존의 독립영화들에 대한 부정의 방식 속에 위치시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이 글은 그걸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간단히 말해, 후자의 반응은 독립영화를 하나의 경향으로 낙인찍고 분리시키는, 독립영화에 대한 몰이해를 전제하며, 그런 식의 평은 정작 <낮술>의 성취를 얼버무리는 무의미한 수사라고 생각한다.

<생활의 발견>과 비슷하지만 다른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도 <생활의 발견>을 떠올린다. 두 영화 모두 무언가에 실패를 겪은 남자가 서울을 떠나 충동적으로 이어가는 여정 속에서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우연이지만 반복되는 상황을 맞닥뜨리며 실소를 자아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외관상의 유사점만 가지고 두 영화를 닮았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생활의 발견>이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이루어진 건 맞지만, 이때 여행 혹은 여행지가 현실로부터 차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상투적이고 우연한 순간들의 반복을 통해 현실의 덧없는 본질을 적나라하고 뼈저리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하지만 <낮술>에서 내가 보는 건 여행을 끝내지 않으려는 안간힘, 달리 표현하면 어떤 식으로든 현실로의 귀환을 좌절 혹은 실패시키려는 은밀한 시도들이다. 종종 평자들은 이 영화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모든 남자들의 판타지를 반영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낮술>의 세상을 판타지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어떤 세상이기에 영화는 여행에서 돌아가길 이토록 망설이는가?

이 여행의 동인은 말할 것도 없이 오인의 구조에 따른 충족의 끊임없는 지연이다. A인 줄 알았던 누군가가 A가 아니라는 설정(서로 다른 두 인물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는 상황은 물론, 외면만 보고 판단한 누군가의 꺼림칙한 이면을 알게 된 상황도 포함된다), 즉 주인공을 불만족의 상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여행의 시간을 지속시킨다. 기대는 번번이 좌절되고 호의는 종종 배신당하고 후회가 밀려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행은 원점에서 다시 계속할 명분을 얻는다. 사실 이런 상황들의 연속은 작위적인 구석이 있는데, 영화는 끝까지 반복되는 이 모든 상황들을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 서사를 억지라고 말하지 않는 건 영화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혹은 한 상황에서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기 위해 매 순간 알코올의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했을 때만큼 이성적인 판단의 기준이 마비되고 우연한 욕망들이 대담하게 투명해지는 때가 있겠는가. 게다가 욕망은 어차피 실패를 전제로 살아남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영화는 필연 같은 우연의 연속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는 건 타당한 질문이 아니며, <낮술>의 세상은 우리가 술에 취할 때 상상하는, 혹은 가능할 법한 최선과 최악의 순간들을 모은, 술의 환상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기술적인 미숙함 때문이라지만, 포커스가 나간 화면들이 종종 이런 판타지의 재현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경제적 궁핍함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

그런데 술만큼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여자가 아니라) 영화가 이 여행에 돈을 개입시키는 방식이다.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최소한일지라도 돈이라는 물질적인 조건이 전제되지만, 대부분의 로드무비는 그 사실을 하찮게 취급한다. 반면 <낮술>에는 하루를 더 머물기 위해, 술을 더 마시기 위해,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돈의 액수가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이와의 낭만적인 만남이라는 것도 때로는 노골적이고 때로는 은밀하게 돈을 기반으로 한 교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혁진이 여행의 기반이 되었던 지갑을 빼앗긴 뒤, 이제는 쾌락의 문제가 아닌 그야말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여전히 여행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돈이 없으니 자의로 귀환할 수 없다는 당연한 상황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가 카드가 남겨진 자신의 지갑을 우연히 되찾고 터미널에서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마지막까지 보고나면 앞서 말했듯, 어떤 확신이 든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돌아갈 순간을 미루고 있다. 이 지점에서 처음의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이 덧붙여질 수 있다. 아마도 1박 정도로 예상되었던 여정이 5박으로, 아니, 더 늘어날 것을 암시할 때, 이 찌질한 청춘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에 대해 의아해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노영석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88만원 세대의 방황과 좌절을 반영한다고 본 관객의 견해에 대해 말한 적 있다(<씨네21> 660호). 나는 그들의 비평에 동의하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이 영화를 읽는 데 하나의 방향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지엽적인 지적으로 느껴지기는 해도, 예상치 못한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소비가 이루어질 때, 그러니까 산골 펜션에서 이틀을 묵고 여인에게 양주와 자연산 회를 사주고, 모든 유흥비를 낼 때 혁진은 단 한 차례도 머뭇거리지 않는데, 전혀 부티 나게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뭔가. 그는 자기 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하는 아버지를 도와주고 있다고 딱 한번 말한 적 있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다급하지 않고, 취업 준비에 골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삶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중산층 20대 백수라는 말이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 역시 딱히 직장을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자기 소유인 것 같은 근사한 차가 있으며, 혁진을 감쪽같이 속이며 사업 파트너로 자신들을 소개하는 커플 역시, 사기꾼이지만 경제적 궁핍함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 보인다. 즉 이들이 정신적으로 찌질하다고 해서, 그것이 경제적인 삶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낮술>의 세상을 가난한 청춘의 절박한 방황과 좌절로 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낮술>의 세상이란 숙취에 괴로워도 막상 취기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자들의 세상이며, 우리가 ‘정상적인’ 어른의 삶이라 일컫는 세상, 즉 제도 안에서 노동을 하고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는 ‘생산적’인 삶으로 돌아가길 망설이는 피터팬들의 세상이라고 부를 만하다(실은 이 두 세상이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여행과 술은 그런 판타지를 주지 않는가!). 이를테면 ‘형’으로 불리는 펜션 주인은 혼자만의 세계에 취해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노쇠한 아이처럼 그려지는데, 아마도 <낮술>이 꿈꾸는 세상에 가장 근접할 듯하다. 특히 남자 셋이 추운 강가에서 물고기를 안주 삼아 궁상맞게 술에 취해는 장면은 기이하게 평화롭다. 감독이 직접 만든 기괴한 음악을 배경으로 술 취한 형이 춤을 추고 그 뒤로 혁진과 친구가 동명이인의 두 여자를 한 여자로 착각하여 서로에게 덤벼드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은 <낮술>이 끝까지 품고 싶어 하는 세상이자 찌질함도 찬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복수 감행하는 란희 누나의 존재

이렇게 본다면, <낮술>에서 가장 이상한 인물인 란희 누나는 단순히 유머를 위해 배치된 자가 아니라 낮술의 판타지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현실을 끼얹는 존재다. 그녀는 생각보다 복합적인 캐릭터다. 호감을 처절한 무시로 돌려받은 뒤, 그녀는 혁진 앞에 꿈까지 포함해 세번이나 더 등장해서 세심한 복수를 감행한다. 그녀는 낮술의 세상과 거의 동의어라고 할 만한 철들길 거부하는 성기를 조롱하고 위협하며 그것의 초라함을 일깨우는 침입자와 다름없다. 혁진의 유일한 꿈장면에서 그녀가 혁진의 목을 조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라. 조금 과장해서, 그녀는 혁진이 끝내 돌아가길 미루는 어른 세계의 표상이다. 아니, 어느 피터팬의 눈에 비친 어른 세계의 무시무시한 형상이다. 그녀는 펜션의 남자들이 술을 권할 때에도 내일은 회사를 가야 한다며 유일하게 현실의 시계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취기에 빠져 추억과 이상을 되새김질하는 남자들 틈에서 그녀가 읊는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버렸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무였겠지”와 같은 시는 이상하게도 그들을 향한 연민의 노래처럼 들린다. 혹은 그들과 달리 현실의 질서에 한발 담그고 있어도 여전히 종종 그들과 같아지고 마는 자신의 처지를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슬프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의 마지막, 혁진이 돌아가는 시간을 또다시 미루기로 결심할 때, 란희 누나 같은 방식으로 그를 비웃으면서도 연민하고 싶다. 그가 이 시대 청춘의 목을 죄는 궁핍함과 싸우지 않고 비루한 중산층 피터팬으로 망설이는 체하다 결국 유희와 소모의 여정을 택하더라도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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