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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찰나의 순간에 본질을 담는다
장영엽 2009-03-05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Karsh)전>/3월4일~5월8일/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02-1544-1681

Yousuf Karsh, (Pablo Casals), 1954, gelatin silver print

작가의 외교력 지수 ★★★★★ 친절한 설명에 감격 지수 ★★★★

1941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를 방문했다. 의회에서의 연설을 마친 처칠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기실에 들어섰다. 순간, 한 남자가 카메라의 조명을 켰다. “각하, 제가 이 역사적 순간을 기념으로 남기는 행운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처칠은 당황했지만 기꺼이 그의 모델이 되어주겠다며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처칠은 또 한번 당황했다. 그러자 남자가 다가와 정중한 포즈로 처칠이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빼앗았다. 완고한 영국 총리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카메라 셔터는 바로 그때 터졌고,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처칠을 대표하는 사진 <으르렁거리는 사자>가 탄생했고, 20세기를 풍미한 인물사진의 거장 유섭 카시(1908~2002)가 그의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막 20세기의 어느 유명 인사를 추억하려 한다면 그건 유섭 카시가 창조해낸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다. 윈스턴 처칠부터 오드리 헵번과 앨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까지 카시의 뷰파인더에 머물지 않았던 20세기 유명인을 찾기란 힘들다. 혹자는 그 이유를 카시의 뛰어난 외교력에서 찾는다. 으르렁거리던 처칠이 사진 촬영이 끝난 뒤 방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쉽게 자신을 내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거물들까지 카메라 앞에 세운다는 건 직업적인 신뢰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섭 카시는 찰나적 순간에 한 사람의 본질을 담을 줄 아는 사진가였다. 헵번의 기품, 아인슈타인의 천진난만함, 파블로 카잘스의 서정성. 유섭 카시의 사진은 한 인간에 대한 충실한 자서전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설명해줄 수 있는 기술(記述)가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운영하던 스튜디오의 문을 닫는 그날까지 카시는 1만5312명의 사진을 찍었다. 1만5312개의 자서전을 쓴 셈이다.

<인물사진의 거장 카시(Karsh)전>은 카시의 인물사진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유섭 카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회는 카시의 대표작 70여점을 소개한다. 앞서 언급한 20세기 명사들의 사진과 더불어 그들의 일대기와 카시가 직접 기록한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를 함께 전시한다. 한편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한국 인물사진 5인전>은 한국 인물사진의 거장으로 불리는 다섯 작가(고 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임동욱)의 작품 20여점을 소개한다. 안익태, 서정주, 김기영 등 한국의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과 안성기, 김희애, 전도연, 송강호 등 현재의 얼굴들이 어우러진 전시다. 한 가지 더. 유섭 카시 본인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임영균 작가의 카메라에 담긴 유섭 카시를 감상하면 된다.

사진제공 뉴벤처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