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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창조는 관객을 거절하면서 시작된다”
2001-11-23

영화평론가 임재철, 대만 거장 허우샤오시엔을 만나다

1980년대 말, 대만영화는 이란영화와 함께 미학적 신세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 허우샤오시엔이 있었다. 민족의 상처를 성장의 통증에 실어보냈던 초창기를 지나 엄격한 형식미로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탐구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는 20세기 영화미학의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성취다.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이 쉰살의 거장은 신작 <밀레니엄 맘보>에서 이제 동시대 대만 젊은이들의 생활에 카메라를 갖다대고 있다. “이건 10년 동안 만들어질 3부작의 미완성 서장”이라고 그는 말했다. 임/편집자 나의 인생, 나의 영화

부산에서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허우샤오시엔은 “부산을 처음 방문했다. 자갈치 시장이 마음에 들어 자주 나가봤는데 화투를 치고 있는 남자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자갈치 시장의 풍경이나 화투 치는 남자들이 그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을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는 대만의 남루한 변두리에 태어나 싸움질과 도박으로 소일하는 내일없는 건달로 10대를 보낸 사람이다. 그의 성장과정은 <펭퀘이에서 온 소년>을 비롯한 80년대 작품들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는 “감독으로서 나는 내 속에 담긴 걸 더욱 충실히 드러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임재철(이하 임)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만든 당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80년대 초 미국에 갔다온 에드워드 양이 권한 파졸리니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당시엔 대만에서 서양영화를 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파졸리니 영화를 본 것이 당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또 지금에 와서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어떤 감회가 드는가.

허우샤오시엔(이하 허우) 처음 영화 찍을 때는 아주 쉽게 만들었다. 스토리가 있으면 그대로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초기의 영화들은 그래서 대부분 직접적이고 단순하다. 그런데 에드워드 양 같은 유학파들이 돌아와 듣도 보도 못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생소한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영화의 형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에드워드 양이 권한 파졸리니의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서 관점의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감독의 관점으로 찍을 수도 있고, 주인공의 관점으로 찍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예컨대 <밀레니엄 맘보>는 두 관점이 섞여 있는 영화다.

임 지금에 와서 판단할 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감독이나 영화가 있었나.

허우 모든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찍는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모두 다른 영화를 찍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 감독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웨인왕의 <딤섬>을 보고 나는 감독의 혈액형이 A형이고 이러저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을 거라고 점친 적이 있다. 나중에 웨인왕을 만났는데 내 점이 아주 정확하더라. (웃음) 나는 열정과 개성이 있는 사람이다. 내 주인공들은 비참하진 않지만 아주 어려운 상황을 겪는다.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받아들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영화 만들기는 인간과 세계와 나를 탐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임 감독이 개인사적 체험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신의 최근작들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국재견, 남국>이 상영됐을 때, 한 미국평론가가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마음만 먹으면 마틴 스코시즈 못지않게 폭력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당신은 자기 속에 있는 걸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과격하게 더욱 육체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허우 글쎄, 그게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는 복잡하다. 절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인간사회에는 있다. 권력과 섹스에 의한 폭력이 그런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직후부터 예의범절이라는 것, 피해야 될 것들을 학습을 통해서 배운다. 그러나 예의는 인간의 본능을 억압한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이데올로기도 본능을 억압한다. 문제는 유전인자에 포함된 욕망은 예의로도 이데올로기로도 억압될 뿐이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억압이 폭력성을 만들어낸다. 감독은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난, 예의와 이데올로기가 다스리지 못한 인간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감독으로서 내 속에 있는 걸 더욱 충실히 드러내려는 것이다.

임 아까 말한 아사야스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신은 정말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난 것 같다. 아사야스와 함께 고향에 내려간 당신이 어릴 적 친구의 소재를 확인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총맞아 죽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신이 주로 도박을 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보와 함께. (웃음) 이런 성장환경이 당신의 영화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

허우 당연히 큰 영향을 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 남자애들은 무리지어서 조직끼리 싸웠다. 나도 그런 무리에 속해 있었다. 술 먹고 싸우고 도박하고…. 그래서 대학은 당연히 못 갔고,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21살에 군대를 가니까 그런 생활이 단절됐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심오한 건 아니다. 내가 속했던 조직에선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폭력조직이나 정치에서나 남자들은 권력을 위해 싸우게 마련인데 나는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아, 그리고 지금 나이가 쉰인데도 여전히 싸움을 좋아한다. 특히 택시운전사하고. (웃음)

임 아사야스의 다큐멘터리 얘기를 자꾸 하게 된다. 당신의 개인사를 알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니까 양해해달라. 거기 보면 술과 가라오케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허우 그렇다. (웃음) 젊었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나무 밑에서 노래 연습한 적도 많다. 술도 좋아하는데, 독한 술은 주로 중국의 백주를 마신다. 맥주처럼 도수 낮은 술은 싫다. 데킬라, 보드카를 좋아한다. 아, 참 한국의 진로도 아주 좋다.

<밀레니엄 맘보>, 그리고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밀레니엄 맘보>는 허우샤오시엔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팝적인 요소가 많다. 마약에 테크노와 배려없는 사랑에 중독된 타이베이의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며, 카메라는 그들에게 전에 없이 가깝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 움직인다. 변함없는 건 한 시퀀스가 대부분 컷없는 한 숏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그는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옷도 하나 입다보면 바꿔 입고 싶다. 나는 산양자리라 그런지 변화를 즐긴다.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임 <밀레니엄 맘보>는 대만 젊은이들을 그린 3부작 중 가운데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3부작 구상의 동기가 궁금하다.

허우 타이베이에 살고 있으면서도 타이베이를 잘 모르고 살았다. 나를 먼저 자극한 건 스트레스가 많기로 이름난 일본인들이었다. 내가 아는 30대 일본인 한 사람이 투신자살을 했다. 성실하고 착한 전형적인 일본 직장인이었는데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타이베이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타이베이는 정치적 혼란이란 짐이 한 가지 더 있어 훨씬 복잡하다. 그게 가정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예컨대 한 가족 내부에서 누구는 민진당을 지지하고 누구는 국민당을 지지하면 그 가족은 갈등을 겪는다. 다양한 생활상의 타이베이를 하나의 각도에서 긴 시간을 두고 그려보고 싶었다. 그걸 10년 동안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스토리>를 보면 오즈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공간을 묘사하는 데 각도가 참 좋았다.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묘사할진 머릿속으로는 잘 그려지는데, 이야기로 푸는 건 어렵다.

임 한국에서 개봉된 건 <비정성시>밖엔 없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80년대 초기작들은 영화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비정성시> 이후의 작품들에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아마도 초기의 노스탤지어적인 요소가 사라진 대신 엄격한 형식이 전경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는 좀 뜻밖이다. 예컨대 카메라가 대상에 이만큼 가깝게 다가간 적이 없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허우 대상이 변하면 스타일도 변할 수밖에 없다. 이전엔 대만의 변화 과정을 찍었으나 이젠 지겨워졌다.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다. 나는 하나의 소재로 영화를 두번 찍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같은 소재를 두번 찍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지겹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지겨워진다. 영화 한편 찍고 나면 “아유, 이건 지겨워”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긴 한데, 원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고집과 편견이 심해지지 않는가. (웃음) 비슷해 보일진 모르지만 영화마다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 <남국재견, 남국>의 무대가 현대이긴 했지만, 그건 내가 거쳐온 현대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대를 무대로 가족과 전통을 다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밀레니엄 맘보>는 바로 오늘의 타이베이다. 이게 내 작품의 스타일을 바꿔놓은 건 확실하다. 오늘의 타이베이 젊은이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 스타일이 바뀌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여성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었다. 이전엔 여성 묘사가 딱딱하고 너무 전형적이었다. 여자에 대한 이해가 적었기 때문인데, 나이가 드니까 여성을 조금은 더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여성에 대한 흥미도 깊어졌다.

임 약물복용이나 테크노바장면이 나온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당신에게 별로 익숙지 않은 세계였을 것라고 짐작했다. 영화 찍기 전에 실제로 얼마나 취재를 했는지 궁금하다.

허우 <남국재견, 남국>에서도 디스코장을 묘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실제로 음악하는 사람을 캐스팅했다. 그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관찰을 했는데, 테크노바도 그때 구경했다. 당시에 난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강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젊은이들은 모두 마약을 한 상태였다. 어떤 기분일지가 하도 궁금해서, 그래서 나도 한번 마약을 해본 적이 있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에 빠져드는 건 좌절감 때문이다. 그래봤자 일시적인 위안밖엔 안 되지만. 한 젊은이를 알게 됐는데, 이 친구의 아버지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매우 엄한 사람이었다. 이 젊은이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주눅이 들어서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약을 하니까 용기가 생겨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약이 번져가고 있는 거다.

임 <밀레니엄 맘보>는 어쩐지 별다른 준비없이 찍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허우 촬영 1년 전에 실제로 음악하는 친구들을 캐스팅해서 한번 찍어봤다. 그런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배우를 쓰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고쳤다. 양조위, 장만옥을 쓸 생각이었는데, 두 사람이 <화양연화>에 먼저 출연해버렸다. 할 수 없이 서기를 캐스팅했는데 그러다보니 시나리오를 또 고쳐야했다. 배우가 바뀌면 시나리오에서 뜯어고쳐야 할게 생각보다 훨씬 많다. 영화 촬영하면서 시나리오 수정을 병행했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 거다. (웃음) 하지만 시나리오대로 찍지 못한 건 사실이다.

임 오히려 미완성의 느낌을 노린 것 아닌가.

허우 어차피 완성되긴 힘든 영화였다. 너무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영화는 계속 찍어나갈 영화 중 서막이 될 것이다. 사실은 이전에도 그랬다. 내 영화는 대부분 찍어나가면서 고치는 영화였다. <남국재견, 남국>은 9개월 동안 3번 고쳐서 찍었다. 하기야 이 방면의 대가는 왕가위지.(웃음) 그 사람은 한 영화를 15개월 동안 계속 고쳐가면서 찍으니까.

임 비키(서기)의 내레이션이 2011년 시점에서 흘러나온다. 그렇게 시점을 잡은 동기는? 또 비키의 목소리인데도 자신을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허우 관점의 문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다양한 각도에서 내다보기 힘들다. 난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 여러 각도에서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11년이라는 시점은 나이를 먹은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위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1년은 3부작이 완성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때 모든 걸 새로 편집해볼 생각인데, 어떤 영화가 나올진 나도 알 수가 없다. 비키가 자신을 그녀라고 부르는 건 그 자체로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영화가 주관적으로만 흐르지 않기 바랐고, 그 호칭 자체가 이 영화의 객관적인 시점을 암시하고 있는 점이 있다.

(허우샤오시엔은 공동기자회견에서 10년 동안 찍을 <밀레니엄 맘보>를 포함한 타이베이 3부작말고도 “기존 무협과 다른 무협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쉰 고개를 넘어 그는 더 크고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남은 궁금증들

허우샤오시엔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를 창조하는 것은 관객을 거절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단호한 고집불통의 작가주의적 발언 같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관객을 거절한다고 해서 소통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관객이나 나나 똑같이 현실을 살고 있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실하기만 하다면 소통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관객은 그의 영화로부터 점점 멀어져왔지만 허우샤오시엔은 여전히 자신의 진정성이 영화의 절대적인 출발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임 늘 궁금하던 게 있었다. <비정성시>는 대만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했다고 알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는 당신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대만에서 마음껏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3만, 4만명을 넘지 못한다고 들었다. 작품의 규모는 커져가는데 자국관객의 수는 자꾸 줄어간다. 이런 사실이 당신의 영화 만들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허우 관객이 줄어가는 건 당연하다. 사람을 그리는 관점이 점점 깊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관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소통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유행이나 입맛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처음엔 대만인들이 투자를 했는데, 그렇게 되니까 대만에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쇼치쿠 투자로 세편을 만들었고, 최근엔 프랑스의 투자를 받았다. 하도 관객이 안 들고 있으니까, 이 사람들도 곧 참지 못하게 될 거다. (웃음) 이런 현상이 내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돈이 안 모이면 저예산영화를 만들면 된다. 요즘은 디지털카메라가 있어서 그게 어렵지 않다. 진짜 어려움은 창작욕이 줄지 않을까, 체력이 떨어지지 않을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배 감독들, 예컨대 루이스 브뉘엘 같은 사람들을 보면 70살까지도 영화 만들더라. 나도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으로 두려움을 달랜다.

임 영화산업은 전혀 관심 밖인가.

허우 그렇진 않다. 나도 대만의 영화산업이 발전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부산에 와서 방콕영화를 몇편 봤는데, 요즘엔 한국, 홍콩, 방콕이 일종의 영화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대만은 자국 시장이 너무 약하다는 게 문제다. 나는 별종이다. 실험적이고 깊은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주류영화가 산업을 지탱해주기를 나도 바란다.

임 앞으로 10년간은 타이베이의 젊은이들과 함께 그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게 된다.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허우(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없다. 말을 해도 워낙 안 들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웃음)

임 사소한 궁금증이 하나 있다. 에드워드 양과는 처음엔 친했는데, 요즘엔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허우 (웃으며) 한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에드워드 양이 <하나 그리고 둘>로 상을 받고 나서는 연락이 온다. 요즘은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정리 허문영 moon8@hani.co.kr·사진 손홍주 bright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