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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가 마의 계단을 내려올 때
2001-11-26

60년대 판타지영화 6편 상영, 15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살인마>

감독 이용민 출연 이예춘, 도금봉, 이빈화 제작연도 1965년

<살인마>(1965, 이용민) 이전에 <흡혈화 악의 꽃>(1961, 이용민)이 있었다. ‘한국판 드라큐라’(두 영화 모두 사용한 메인 카피)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그보다 앞서에는 <괴인 드라큐라>(Horror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59년 수입·개봉), <흡혈귀의 선혈>(Blood of Dracula, 허버트 스트록 감독, 1960년 수입·개봉), <흡혈귀 드라큐라의 신부>(Bride of Dracula, 해머 스튜디오, 테렌스 피셔 감독, 1961년 수입·개봉)가 있었다. 이들 수입 공포영화는 ‘처첩’ 또는 ‘계모-전처자식간의 갈등’을 다루는 조선말 이후의 가정소설들과 함께 <살인마>의 중요한 문화적 원천이다.

1967년 <월하의 공동묘지>가 신파를 끌어들여 한국 괴기영화의 경계를 분명히 세우기 이전에 <살인마>는 그렇게 외국 공포영화를 참조틀로 하여 소통되었다. <흡혈화 악의 꽃>이 미친 과학자와 흡혈 모티브를 결합하면서 근대과학에 대한 공포를 재현했으나 어떻게든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열망에 불탔던 60년대 초 한국에서,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근대과학은 오히려 생경한 것이었다. <살인마>는 근대주의에 대한 공포를 밑바닥에 가라앉히고 그 대신 봉건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가족’문제를 표면에 떠올린다. ‘가족 내의 갈등,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은 대중이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겪은 ‘근대의 경험’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적절한 선택이다.

자기에의 자각과 이에 따르는 욕망의 추구는 봉건적 윤리로 묶여 있던 가족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성적, 물질적 욕망의 화신인 시어머니(정애란)와 식모는 ‘현모양처’이자 순종적인 며느리를 살해한다. 어찌 보면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인데 과거의 윤리에 따르는 ‘선’(善)은 이제 더이상 존재이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수의 욕망’에 사로잡힌 귀신으로 되살아났을 때 비로소 그녀는 ‘근대의 주체’가 된다. 귀신이 된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빙의(憑依)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이 여성들에 의해 파괴된 가족은 ‘문수보살’에 의해 복원된다. 그러나 너무나 갑작스럽게, 과잉적으로 복구된 이 가족은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의 선한 가치들’로 회귀한 것인가 아니면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의 담지자로 거듭난 가족인가? 바로 그 망설임 속에 한국 근대의 딜레마가 있다.

<우주괴인 왕마귀>

감독 권혁진 출연 남궁원, 김혜경, 한은진 제작연도 1967년

미소 양국은 오늘 아침 인간의 달 정복을 위해서 거쳐야 할 두 가지의 중대한 우주과학 실험에 성공했다. …‘사상 최초로 우주 도킹’, <조선일보> 1966년 3월17일치.

60년대 말 한국은 ‘강대국’들의 갖가지 우주실험에 흥분하고 있었다. 외국 공상과학영화가 전파한 ‘우주’라는 상상 속의 개념이 현실이 되고 우리도 그 일부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생각이었을 것이다. ‘우주’는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이라는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이 아닌 지구인이며 우리의 적은 적성국이 아닌 지구를 침략하려는 ‘우주인’이다. 1969년 7월16일 아폴로11호의 달 착륙장면이 KBS를 통해 중계되었을 때 한국인은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우주괴인 왕마귀>에 등장하는 수많은 계기판들과 ‘감마성’, ‘자동전파조종기’, ‘비행접시’, ‘레이더’, ‘살인광선’ 등등의 첨단 과학(?) 용어들은 그러한 정체성에의 지향을 보여준다. 이를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한국의 발전된 전기시설, 도시의 빌딩 숲, 최첨단 전투기 등을 보여주기 위해서 때때로 내러티브는 그 걸음을 멈춘다. 결혼식조차 미룬 채 출격한 오 소령(남궁원)은 전투기로 왕마귀를 공격하고 마침내 감마성의 우주인들은 ‘철통 같은 방위태세’에 막혀 지구정복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약소’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도사리고 있다. 왕마귀를 피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서 한국전쟁의 피난민 행렬이 떠오르고 딸(김혜경)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한은진)에게서 이산민족의 슬픔을 본다. 위용을 자랑하던 전기시설과 빌딩 숲은 왕마귀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진다. 그것은 마치 지구인이 됨으로써 강대국과 하나가 되려는 우리의 꿈처럼 허약하다. 이런 점에서 감마성이 왕마귀를 스스로 폭파하고 지구정복의 생각을 접는 ‘비균질적인’ 결말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지구인’으로서 ‘강대국’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소민족’으로서 겪었던 현대사의 질곡에 대한 기억이 <우주괴인 왕마귀>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 혼란, 그 아이러니는 서구에서 ‘기원’한 근대과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근간에서 틀짓고 있다. 세계화와 첨단 테크놀로지의 담론 속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최근의 <용가리>에 이르기까지, 한국산(産) 공상과학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지구인인가 한국인인가?

<월하의 공동묘지>

감독 권철휘 출연 황해, 박노식, 강미애, 허장강 제작연도 1967년

‘동정해서 울고/ 무서워서 놀래고/ 몸서리치는 흉계/ 숨가쁜 복수 또 복수/ 눈물의 영화 공포의 영화’(<월하의 공동묘지> 신문광고 중에서)

오래 전부터 폄하되어온 ‘눈물의 영화’(신파)와 ‘공포의 영화’(괴기)가 만났으니, 이 영화가 비평담론의 덕을 보았을 리는 없다. 신파란 무엇인가? 한국의 대중이 근대가족을 상상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신파영화는 그 상상력에 의한 가장 대중적인 재현물이다. 이 영화가 ‘전설’이 된 것은 주류 비평담론의 멸시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신파의 생명력, 근대가족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저 밑바닥 상상력과 관계가 있다.여학생 명순(강미애)은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오빠 춘식(황해)과 애인 한수(박노식)의 옥바라지를 위해 기생 ‘월향’이 된다. 그리고 명순을 위해 오빠는 혼자 죄를 뒤집어쓴다. 그 덕에 세상에 나간 한수는 ‘장안 제일의 갑부’가 되어 월향을 아내로 맞는다. 그러나 한번 훼손된 누이의 아내되기는 가탈스럽다. 설사 그녀가 가부장의 계승자인 아들을 낳았다 할지라도.

일제시대에 만주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장안 제일의 갑부’란 무엇인가? 식민지공업화시대에, 독립운동가에서 제국주의의 열매를 나눠먹는 처지로 변신한 부르주아, 즉 그가 바로 변절자이며 해방된 조국의 자본가인 것이다. 그는 새로운 가족을 꿈꾼다. 독립운동의 명분(갇혀 있는 춘식)과 민족수난사(기생 월향)를 지우고 싶은 것이다. 이런 그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것은 더 사악하고 탐욕스런 근대주의자 찬모(도금봉)와 의사(허장강)이다. 월향을 독살하려는 그들의 ‘흉계’를 그는 묵인한다. 그렇게 명분과 민족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대중의 상상 속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월향은 귀신이 되고 오빠는 탈옥한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민족과 독립운동의 명분은? 탈옥한 춘식과 아들을 안은 한수는 월향의 무덤 앞에서 조우한다. 하지만 춘식은 한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훼손된 민족(월향)을 땅에 묻고 독립운동가 춘식은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그에게도 이제 명분은 유령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것을 짓밟은 위에 세워진 근대가족을 끝내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온 나라가 ‘근대화’의 속도전에 내몰리던 60년대 말, 그 시대 민중의 속내를 드러내준다. 민중이 역사를 꿰뚫는 혜안을 가졌다면 이 영화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엘리트들이 세련된 서구 모더니즘영화의 언어로 도시인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고 있을 때 말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이순진/ 영화평론가 이순진/ 영화평론가 SHODO@chollian.net▶ 60년대 판타지영화 6편 상영, 15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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