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얼굴 없는 것들
장영엽 2009-04-24

<사모트라케의 니케> Winged Victory of Samothrace, B.C. 220~190(추정)

미술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찾는다. 비단 인물을 모델로 삼은 회화와 조각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화병의 꽃과 접시의 사과, 봄날의 잔디밭, 심지어 추상을 그린 작품이라고 해도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그것의 ‘얼굴’- 눈의 초점을 맞추고 감정을 투사할 점- 을 본능적으로 찾아 방황한다. 자크 오몽이 썼듯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결국 타자의 얼굴이며, 존 버거가 <포켓의 형태>에서 지적한 대로 모든 화가는- 그리고 내 생각에는 관람자 역시- 자신이 보낸 응시를 되돌려줄 화답의 시선을 대상에게서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상을 모방한 회화와 조각에서 얼굴의 부재는 충격을 야기한다. 결핍은 거기 존재했어야 마땅한 것을 강력히 환기시킨다.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의 목 없는 기사는,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수숫단처럼 베어넘김으로써 참수당한 자의 원한과 영원한 환지통(幻肢痛: 이미 잃어버린 신체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현상)을 호소한다.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사람들은 종종 그림자나 피로 얼굴이 문질러져 있다. 술집의 어둠에 몸을 숨긴 고독한 사내, 의자에 앉은 화가의 어머니, 교황 이노센트 10세 등 베이컨이 그린 무수한 ‘지워진 얼굴’들은 그것을 차마 바라볼 수 없는 화가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통증은 즉각 감염되는데, 개성적 영혼의 표상인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경험과도 흡사하다.

얼굴은 한편, 늙어 사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숙명을 새긴다. 1883년 이래 루브르 미술관의 계단참에 오연히 서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은 사라진 얼굴로 인해 불멸의 경지로 비상한 경우다. 6세기경 에게 해 북쪽의 사모트라케 섬을 덮친 지진으로 부서진 이 헬레니즘 시대의 석상은 기어이 머리와 팔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니케는 극심히 손상된 상태 자체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해 ‘훼손’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 천사보다 괴수의 그것에 가까운 여신의 우람한 날개는 막 뱃머리에 착지하려는 듯 치켜올라가 있으며, 해풍의 습기와 소금기를 머금고 달라붙은 옷자락과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은 역풍에 맞서 나아가려는 도도한 의사를 감추지 않는다. 얼굴도 이름도, 왼손잡이였는지 오른손잡이였는지도 알 수 없는 어느 고대 예술가가 여신의 몸을 빌려 조각해놓은 것은 바람과 의지다.

고고학자들은 니케가 손나발을 불고 있었고 가슴의 위치로 미루어 고개를 뒤로 젖힌 자세였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과연 이 조각 앞에서 누가 그것을 궁금해 할까? 니케의 몸은 얼굴의 결핍으로 인해 목소리를 얻었고, 날개는 팔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머리와 팔을 잃어버림으로써, 서사시적 순간에 멈춰 선 이 석상이 구현하는 결정적 모멘텀은 더욱 뾰족해졌다. 소설 <잘려진 머리>의 작가 아이리스 머독은 “전능하고 정이 있는 존재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를 창조할 만큼 충분히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나 머리없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신의 마지막 손길이 완성한 경이적 아름다움을 통해 어떤 설교보다 유려하게 신의 존재를 설득한다.

주* 역시 유실된 니케의 오른쪽 날개는 남아 있는 왼쪽 날개를 본으로 삼아 복원한 것이다. 1950년 고고학자 필리스 윌리엄스 레만이 발굴한 오른손은, 비엔나 예술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손가락 파편을 봉합해 니케 상 근처에 따로 전시돼 있다. 동명 스포츠 브랜드의 유명한 로고는 니케 상 날개의 날렵한 선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