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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동성애자 주제 <헌법 175조> 지난 10월 말 개봉
2001-11-27

10만 비극적 사랑에 바친다

“히틀러는 동성연애자?” 판매부수 1위를 자랑하는 독일 황색신문 <빌트>가 브레멘의 사학자 로타 마흐탄의 신간 <제3제국(나치)과 동성연애>를 소개하며 달아놓은 제목이다. 센세이셔널한 기사 덕분에 마흐탄의 신간이 주목되는 가운데, 나치시대 동성연애자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헌법 175조>가 10월 말 베를린에서 개봉됐다. 사회 변방에 선 계층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다독거리는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감독 로버트 엡스타인과 제프리 프리드먼의 <헌법 175조>은 나치헌법 175조를 내세운 히틀러의 동성연애 말소정책에 희생된 10만명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동성, 특히 남성간의 애정행각을 비윤리적, 비사회적 범죄행위로 간주한 헌법 175조는 지금까지도 동성연애에 대한 법적, 사회적 차별을 상징하는 메타포. 이 조항이 처음으로 성문화된 것은 18세기 말로 당시 프로이센 제국은 남성간의 성교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다. 그러나 이 조항이 실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히틀러 집권 뒤로, 히틀러는 35년 이 법문에 살벌한 처벌방식을 첨부해 동성연애자들을 탄압하는 175조를 헌법에 추가했다. 1933년에서 45년까지 체포된 동성연애자 10만명 중 1만5천명이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 이른바 사회화교육을 거친 뒤 거세수술을 받거나 인체실험 대상이 되어 죽어갔다. 일종의 인터뷰 필름이라 할 수 있는 <헌법 175조>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남성 5명과 여성 1명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담담히 들려주는 개인사가 영화의 뼈대로 알자스 출신 생존자는 애인이 수용소 군견 셰퍼드에게 물려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도록 강요받았다고 말한다. 오로지 수많은 남자들과 지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입대했다가 신검에서 수용소로 직행한 귀족의 아들도 있다.

엡스타인과 프리드먼은 사학자 클라우스 뮐러의 자문을 받아 신빙성 있는 시대다큐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생존자 6명의 증언 사이에 삽입된 사료들 역시 뮐러의 꼼꼼한 고증을 거쳤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다큐감독상, 베를린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 등을 받았던 <헌법 175조>는 이들의 전작 <셀룰로이드 클로짓>과 마찬가지로 일반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 다큐영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즉 맘에 와 꽂히는 뭉클한 주제, 정치적으로는 절대 중도노선을 걸을 것, 미학적으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되, 지성적 측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김빠진 맥주 스타일의 다큐 말이다.

국제관객을 의식한 결과인 듯, 히틀러 집권 초기에 발생한 베를린 제국의사당 방화와 분서사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지나침에 반해, 전후 독일에 대한 설명은 주석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헌법 175조>는 600만 유대인 희생자에 가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나치 동성연애자 희생자 10만명을 기리는 영화적 추모사라는 점만으로도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베를린=진화영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