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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한 문제제기
2001-11-28

한국영화의 미래를 고양이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김경현/ 미국 UC Irvine 동아시아문학과 교수· kyunghk@uci.edu

대중관객의 관습적인 반응에 의해 정해진 규율은 장르를 형성한다. 주인공은 일상에서 찌든 우리와는 다른 멋이 있어야 하며, 적절한 장면에서 달콤한 음악이나 혹은 때에 따라서는 소름끼치는 음악이 나와야 한다. 카메라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줌이나 클로즈업을 써야 하며, 주인공들이 대사를 주고받을 때는 화면나누기를 통해 카메라가 대상을 응시해야 한다.

이 ‘게임의 법칙’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전개를 주도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아주 유치해야 하며, 일상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관객을 더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연출자가 ‘피곤한 질문’을 하고 싶을 경우엔 상업영화 구조 밖에서 영화를 만들거나 아니면 유치한 질문의 가면을 씌워 관객이 쉽게 눈치못채게 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반칙왕>(김지운, 1999)에서 감독이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은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반칙이 불가피하지 않나?”이다. 이것은 관객이 싫어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는 삶과 너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인생에서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극장이 이런 질문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찾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반칙왕>은 이 리얼리즘적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은행원인 송강호가 레슬링 챔피언이 될 수 있나 없나?”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송강호가 쓴 타이거 마스크 뒤에 꼭꼭 숨겨놓는다. 그리고 이 허무맹랑한 질문이 마치 영화에서 제일 유효한 질문인 것처럼 관객에게 전파하고, ‘헤드록’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모티브를 통해 이야기를 힘있게 몰고나간다.

<오! 수정>(홍상수, 2000)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온갖 관습과 상업적 코드를 배제하면서도 관객을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정보석과 이은주는 과연 섹스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은 관객을 흥분시킨다. 게임이 성공한 셈이다. 이 영화가 사실 묻고 싶은 질문은 “섹스는 폭력적이지 않나?” 혹은 “우연이건 고의이건 삶이란 어차피 그렇고 그런 것 아닌가?”이다. 홍상수는 이 철학적 질문들을 프랑스 작가영화처럼 논쟁적으로 부각시킨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 “주인공들이 섹스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같은 저속한 질문들이 상업영화의 언어방식을 통해 구성된다면 B급영화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의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작위적이고 폐쇄적인 영화적 관습을 좇지 않는다. 감독은 음악, 클로즈업, 불필요한 카메라 이동, 숏/리버스숏, 시간의 일관성, 심지어 컬러 등을 제외시킨 채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그리고 관객은 <오! 수정>이 ‘게임의 법칙’을 무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불평하지 않는다. 일반관객은 이 영화가 작가영화인지 상업영화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밀도있게 그려진 주인공들, 그들의 일상성이 녹아 있는 공간, 짜임새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너무 재미있는 퀴즈 같은 질문(정보석과 이은주는 몇 번째 만남에서 잠자리를 같이할까요?) 등이 함께 어우러져 관객은 이 영화가 게임의 법칙을 계속 위반하는 데도 개의치 않는다.

예술영화적 주제의식에 상업영화 옷을 입힌 영화

올해 한국영화의 최고 수작이라며 많은 평론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또 여러 유형의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한 좌담회를 발족시킨 문제작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를 부산영화제를 방문해 관람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일반관객과 호흡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느꼈다. 영화 초반부에 혜주(이요원)가 지영(옥지영)을 아침 일찍 불러내 그녀가 선물받았던 고양이를 다시 돌려주는 장면에서 필자는 이 영화에서 이 두 친구가 화해하기는 애당초 틀렸다고 예감했다. 이 예감은 필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화해하지 않음은 <고양이…>가 상업영화 극구조의 관습을 좇지 않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지만 이 비관습성을 숨겨놓을 만한 게임과 같은 장치들이 <반칙왕>이나 <오! 수정>과 달리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양이…>는 예술영화적 주제의식에 상업영화 옷을 입힌, 그래서 어색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긍정적인 면은 이 영화가 여러 유형의 사회적 갈등을 거짓화해로 풀이하지 않는 데 있다. 혜주와 지영의 경제적인 환경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두드러지며 끝내는 화해를 할 수 없는 지점을 훌쩍 지나친다. 중반부 이후부터 야기되는 질문은 다른 경제적 계급을 가진 둘이 화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앙숙이 된 그들은 언제 어떻게 갈라질 것인가, 태희(배두나)는 과연 그녀의 가족과 인연을 끊을 것인가, 그리고 지영의 판자촌 집의 지붕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 등의 질문들이 거짓화해를 유도하는 질문을 대체한다. 이런 질문은 사실 리얼리즘영화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다.

실제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걸작인 <움베르토 D>(비토리오 데 시카, 1954)에서 정년 퇴직한 움베르토 할아버지는 아무 희망없이 살다 급기야 자신의 작은 방에서조차 쫓겨날 상황에 처한다. 애완견 한 마리는- 지영의 고양이와 같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가 어느날 자선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벽은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허물어져 있고, 그의 개도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의 종반부에서 입을 다문 채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 당찬 지영의 모습에서 나는 구차한 삶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선택하려는 움베르토의 존엄성을 느꼈다. 반가웠다. 다만 한국영화에서 지금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젊은 여성의 존재감을 왜 더 리얼리즘의 거친 구도를 통해 그려내지 않았을까 하는 반문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만약 리얼리즘을 벗어난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그러면서도 스무살 여자아이들이 우정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의 거친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제인 캠피온의 초기작 <두 친구들>(2Friends, 1986)의 극구조를 참고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친구들>은 두 여자친구가 절교하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우정의 절정을 보여주며 영화를 끝낸다. 소녀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신변잡기적인 에피소드를 계속 나열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기에…’라는 관객의 호기심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장르의 세 인물

장선우가 <장선우 변주곡>(토니 레인즈, 2001)에서 이야기하듯,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을 말하는 형식, 즉 ‘무엇을’ 이야기하는가가 아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이다. 예술영화에 적합한 주제는 상업영화 옷을 입혀 내놓을 수 없다.

영화사의 최고 걸작 중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와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 등은 할리우드에 의해 각색되어 재출시되었지만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고양이…> 역시 주제는 리얼리즘영화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전형화된 캐릭터들, 간간이 터져나오는 달콤한 음악, 매지컬 리얼리즘과 네오리얼리즘 중간에 어중간하게 설치되어 있는 조명, 현실의 소녀들과 거리가 있는 스타 캐스팅(특히 이요원) 등은 상업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일 큰 문제는 세명의 캐릭터가 독자적인 장르의 인물을 구축하고 있고, 영화의 각 장면들이 이 세 캐릭터들을 한 화면 안에 어울릴 수 없게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영은 앞서 언급한 대로 리얼리즘영화의 전통을 따른 인물이다. 태희는 주로 일본영화에서 등장하는 엉뚱하고 깜찍한 인물로 그려진다. <비밀의 화원>(시노부 야구치, 1996)의 사키코 스즈키나 굳이 한국영화에서 예를 들자면 <첫사랑>(이명세, 1993)의 김혜수를 닮은 전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순정적이면서도 자기 줏대가 강해 가족들과 자주 마찰하는 태희는 아기자기한 공간 안에서 그 공간에 걸맞은 비현실적인 행동을 한다. 반면 혜주가 차지하는 공간과 아우라는 <접속>(장윤현, 1997) 같은 연애영화나 TV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상승욕망을 가진 젊은 직장여성이다. 이렇게 세 주인공들은 각기 자신들의 영화 장르를 가지고 있고 <고양이…>의 모든 장면들은 그 연출된 방식에 따라 리얼리즘적인 지영, 동화책 삽화 같은 태희, TV드라마의 혜주의 장면들로 나뉜다. 게다가 이런 불연속은 반드시 누가 화면 안에 등장하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것도 아니다. 지영이란 동일한 인물이 화면 속에 나타나도 할머니가 총각김치를 먹는 장면은 지영의 장면이고, 지영이 카페에서 혜주를 기다리는 장면(오버랩으로 연출되어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는)은 혜주의 장면이다. 이런 영화언어의 장르적 불연속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좀더 대중관객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또다른 큰 문제는 많은 대중영화 관객이 그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지영보다는 혜주와 닮았다는 것이다. <고양이…>에서 혜주는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여 신분상승을 지상 목표로 하는, 욕망을 가진 유일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런 혜주의 행각은 얄밉고 이기적으로만 그려진다. 관객은 연출자가 미워하는 캐릭터가 바로 자신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순간 설명할 수 없이 기분이 언짢아진다. 그녀가 가진 페르소나는 <접속>의 주인공 전도연보다는 같은 직장에서 한석규를 유혹하는 안타고니스트 추상미(은희)와 더 가깝게 보인다. 그런데도 <고양이…> 내에서 혜주는 주인공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감독이 혜주에게 큰 애정이 없었다면(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언니들,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이다), 그녀의 비중을 줄이든지 은희처럼 끝내는 자신의 욕망에 의해 ‘폐기처분’되는 요부로 설정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녀를 다시 정의해, 사랑을 하게 만들고, 지영과의 관계에서도 용서와 화해를 하게끔 설정해야 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선택 모두 상투적이라고 판단된다면, 이 영화는 상업영화 구도 밖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고양이…>의 세 주인공 중 유일하게 전형화되지 않은 인물은 지영이다. 그녀는 감독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고 영화를 통해 변화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사실상 <고양이…>의 주인공이다. 감독은 진정한 애정을 통해 가난에 찌든 여성은 언제나 창녀로 전락한다는 한국영화의 오래된 ‘영자’ 방식을 탈피한 지영의 캐릭터를 그려냈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전형에서 온전하게 벗어나려면 상업적 화면의 구도도 함께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인천의 시장과 빈민촌의 공간, 심지어 판자촌의 내부의 모습도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조명으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그림이 연출되었다. 이 공간과 캐릭터의 불협화음은 왜 생겨났을까? 정재은 감독의 단편 <도형일기>는 이미 리얼리즘의 언어를 체계화시켰다. 장편 극영화에서는 왜 이 재능이 발휘되지 못한 것일까? 단순히 제작여건 때문이었다면 <고양이…>는 오히려 제작비를 과감히 줄이고 다른 방식의 영화로 만들어져야 하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필자는 <도형일기>의 연장선상에서 <고양이…>가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날, 비로소 <고양이…>가 한국영화의 대안이자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대안영화는 상업영화의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 <낙타(들)>(박기용, 2001), <나비>(문승욱, 2001), <꽃섬>(송일곤, 2001) 등은 이미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이 영화들은 다수의 관객을 극장으로 몰고 가지는 못하지만 영화를 본 소수관객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영화들이다.

(김경현 교수는UCLA대에서 영화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등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