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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 고흐의 고뇌, 브랜도의 연기
2001-11-28

[짐 호버먼 칼럼] 에드 해리스가 감독·주연한 <폴락>

천재인가 사이코인가? 이것은 <라이프> 1949년 8월호 세 페이지짜리 컬러 기사 ‘잭슨 폴록, 그는 미국 현존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가?’가 내놓은 질문이다.

이제 시장(市場)은 이런 질문을 부적절한 것으로 돌려버린 지 오래되었다. 오늘날은 ‘뜨거운 이슈 잭슨 폴록’, ‘쿨한 이슈 잭슨 폴록’, 또는 ’영화 잭슨 폴록’이 문제일 뿐이다. 에드 해리스가 감독하고 주연한 <폴락>은 <라이프>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놀란 듯한 그 예술가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제 스타예술가가 태어난 것이다.

폴록은 어느 지점까지는 반 고흐의 패러다임을 따른다. 그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고통받았다. 성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었으며 불쌍할 정도로 스스로 청해 고행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반 고흐와 달리 폴록은 그의 생전에 영광을 보았고 그뒤 죽었다. 그는 바스키아와 마찬가지로, 성공도 실패도 제대로 자기 품에 받아안을 능력이 없는 그런 미국인이었다.

예전의 그 어떤 미국인 화가보다도 폴록은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더 제대로 표현하자면, 그는 “강한 성격의 트레이드마크마저 지니고 있었다”고 해야겠다. <타임>은 그에게 “뚝뚝 흘리는 잭”(Jack the Dripper)이란 별명을 지어준 바 있다). 예술세계에서 폴록이 품은 꿈은 강한 적대자와의 투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오프닝신이 흐르고나면 곧장 영화는 8년 전으로 플래시백하여, 화가가 계단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피카소 씨발새끼”(fuck Picasso)라고 잠든 이웃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그에게 아무도 좀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못한다.

폴록 스스로가 천재를 연기하는 메소드 배우의 일종이었듯이, 매우 단호한 어조의 그럭저럭 괜찮은 이 영화는 영화 스스로가 여러 층위의 연기를 보여준다. 거울이 가득한 이 홀의 스타와 감독으로서, 해리스는 매순간 진지하게 움직인다. 오만하게 뽐내며 걷다가 휘청휘청 비틀대기를 번갈아 하는 해리스의 폴록은 이기적인 촌놈이며, 비위상하고 암울하다. 야수 같은 말론 브랜도가 1947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브로드웨이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을 때 그는 뉴욕 화단의 많은 이들에게 폴록을 연상시켰다. 2년 뒤, <라이프>는 폴록을 “추상미술계의 말론 브랜도”라는 식으로 미국에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해리스는 물론, 브랜도가 전형을 만들어낸 바로 그 액터즈 스튜디오 출신이며 그의 연기에는 말로 잘 표현돼 나오지 않는, 고통스러운, 육체적인, 그런 여러 층위의 말론 브랜도들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결혼의 초상이기도 하다. 화가 폴록은 유머라곤 없으며 베티 페이지 같은 머리를 한 동료예술가 리 크래스너(마르샤 게이 하든)가 그의 이스트 빌리지 아파트에 불쑥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자신을 처음 소개한다. 그녀는 이 신비스런 촌놈이 그룹 전시회에서 그녀와 나란히 전시한다는 것을 알고는, “전 제가 뉴욕의 모든 추상화가들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하고 진한 브루클린 악센트로 말을 건넨다. 몇주 뒤, 그는 그녀를 찾아가고 그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줄곧 불행한 채로 서로에게 떨어지지 못하는 사이가 된다. 그의 손이 그녀 캔버스 위를 스칠 듯 지나갈 때 그녀는 그의 가장 섬세한 애무를 받는 듯하다. 한동안은 평온한 시간이 흐른다. 폴록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가꾸었고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었다. 이 평화는 그가 크래스너에게 “아이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부터 깨지고 만다. 그야말로 그녀의 아기였던 것이다.

짤막한 마지막 장은 고통이 배어난다. 뚱뚱하고 수염을 기른 폴록은 폴록으로 가득한 집에 살고 있으며 걸핏하면 발작하는 성난 황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언쟁을 일삼으며 크래스너를 저주하고, 멋진 그루피(제니퍼 코넬리)와 어울린다. 영화는 그가 비록 크래스너를 내쳤을지언정, 폴록은 그녀 없이는, 말 그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임을 지속적으로 암시한다.

‘현대’라는 것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하는 사이, 폴록은 페인팅을 사이코드라마로 변형시켰다. 비록 해럴드 로젠버그가 1952년 액션 페인팅에 관해 썼을 때 그는 폴록을 찬양하기보다는 매장해버리는 데 더 관심을 두었지만, 폴록이 그림이란 “번식을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경기장”이라고 이해했던 실존적 영웅으로 비춰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듯, 해리스는 빈 캔버스를 드레싱룸 거울인 양 응시한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다.

이보다 더 뜻밖인 것은, 그의 뭔가 부족한 듯한 연출이 간헐적으로, 벼랑 끝의 사람들이 느끼는 미친 흥분을 비춰준다는 점이다(“우리는 화가예요, 잭슨.” 하든은 그녀의 주요 장면에서 자랑스럽게 애원한다).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순간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할 때의 전율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비록 이 영화는 폴록 같은 예술가가 자신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세력임을 스스로 진정 믿었을까 하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지만, <폴락>은 그 화가 최고 작품의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지적인 모험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적인 모험이 어떤 것인지 한 예를 보여주기는 하는 것이다.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 <빌리지 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