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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의 송일곤을 만나다
2001-11-28

송일곤 감독 인터뷰

“그렇다, 내 영화는 관념적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개의 상을 휩쓴 직후지만 11월21일 만난 송일곤(32) 감독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과연 몇명이나 <꽃섬>을 보러 극장을 찾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지금까지 <꽃섬>이 확보한 서울시내 극장의 숫자는 8개관. 메가박스나 CGV 같은 멀티플렉스는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고 그나마 지금 확보한 극장들도 얼마나 오래 영화를 걸지 미지수이다. 물론 그가 초조해하는 건 흥행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욕심과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다른 모든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 작품으로 관객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의기소침한 송일곤 감독의 표정에서 요즘 한국영화가 일구고 있는 성공신화의 이면이 드러난다고 하면 <꽃섬>에 해가 되는 일일까?

누군가는 그만큼 상도 받고 해외에 이름도 알렸으면 된 거 아닌가, 라고 할지 모르지만 송일곤 감독은 “다음 작품을 찍을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그가 돌파해야 할 현실이지만 <꽃섬>이 만장일치의 호평을 받는 상황도 아니라는 걸 고려하면 괜한 엄살은 아니다. 그가 “다양성을 인정해달라”고 말하는 건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상업영화가 아닌 동시에 기존 리얼리즘과도 상충되는 <꽃섬>은 여러모로 난감한 입장에 있다. 젊고 재능있는 신인감독 송일곤에겐 수상경력만으로 주목받을 수 있던 지난 시기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할 것이다.

2년 전 칸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장편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그동안 <>이라는 영화를 준비하다가 <꽃섬>을 만들었는데 <>에서 <꽃섬>으로 방향을 전환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

<>이라는 시나리오를 쓰며 2년을 보냈다. 투자가 안 되니까 계속 시나리오만 고치면서 기다렸는데 그러다보니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마음은 중편이든 단편이든 뭐든 찍고 싶었다. 갑작스레 엮여서 <꽃섬>을 찍게 됐는데 감독하는 사람이 방에 앉아서 시나리오만 쓰며 시간을 보내자니 정말 못 견디겠더라. 젊은 나이에 나이에 맞게 표현하고 표출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작품을 하겠다는 욕심 같은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엔 뭐든 빨리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지금은 한편 찍고 나니까 그런 오만방자함이 많이 꺾인 거 같다.

오만방자함이라니, 어떤 뜻인가.

촬영하면서 많이 느낀 건데 저예산영화를 찍다보니까 스탭, 배우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게 많았다. 개봉을 앞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극장도 못 잡고 홍보하는 데도 약점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영화를 왜 만들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의욕이 많이 꺾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계속 만들어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보면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영화가 존재하는 건 관객을 위한 건데….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그렇게 어렵고 난해하게 만든 건 아닌데 하는 생각도 한다. 시사회 반응은 좋아서 뭐가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꽃섬>은 도입부가 상당히 충격적이다. 혜나가 화장실에서 애 낳는 장면에서 눈을 가리는 관객도 상당하다. 남해로 가던 버스가 산에 멈춰 있는 대목에서도 어리둥절한 느낌을 갖는 관객이 많다. 초반부에 단도직입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던져놓는 방식인데 관객에게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염려가 들지 않았는지.

부담이 있었지만 처음 내가 생각한 이미지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 관습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처음부터 세게 던져놓고 판타지로 초대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걸 말로 설명하긴 참 힘들다. 직관인 거 같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 인물 소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을 때 다큐멘터리처럼 찍고 편집에서 골라내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적으로 찍었지만 전체가 우화 같은 것이어서 극단적인 대표성을 갖는 강렬한 이미지로 여행을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인물을 보면서 화면에 드러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충분히 느껴지길 바랐다. 마치 인물화 같은 것이다. 인물화에서 배경이 단순히 처리되듯 인물의 표정에 집중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인물화라는 생각은 디지털카메라로 찍는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1분짜리 단편 <플러쉬>를 찍으면서 디지털카메라의 놀라운 효과를 경험했고 <꽃섬>에서도 그게 주효했다. 그 전까지 단편도 늘 35mm필름으로 정공법대로 찍었는데 그걸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인물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영화문법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꽃섬>은 두 가지 다른 형식이 묘하게 얽혀 있는 영화이다. 인물화인 동시에 판타지라는 것이 그런데, 다큐멘터리와 판타지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게 쉽지 않다. 35mm필름으로 찍었다면 판타지의 느낌이 더 강조됐을 것 같다.

그런 점이 있겠지만 디지털카메라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인물의 느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미지도 그냥 예쁜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칠더라도 아주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 혜나가 들고다니는 날개가 그런 것인데 학교 미술시간에 대충 만든 것 같은 날개지만 아름답게 찍을 수 있었다. 35mm필름으로 찍었다면 현장에서 느낀 많은 부분을 놓쳤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배우들의 연기를 포착하는 데서 드러난다. 배우가 카메라를 향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오감을 열어놓고 자기를 드러내는 식이다. 카메라는 단순히 그걸 따라가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도 유럽에서는 르포 형식을 뛰어넘어 판타스틱하거나 시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다.

디지털카메라에서 경험한 놀라운 파격이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후반부에 나오는 유진의 심리치료장면에서는 배우가 진짜로 가최면상태에 빠졌다. 배우가 일단 연기를 시작하면 5∼10분간 자기 호흡으로 전체를 소화하기 때문에 35mm카메라로 잡을 수 없는 표정이 드러난다. 남해에서 게이커플과 술마시는 장면도 즉흥적인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 술을 마시고 찍었는데 배우들이 풀어진 상태에서 자기도 기억 못하는 대사나 행동이 나왔다.

배우들을 어떤 상황에 앉혀놓고 카메라로 그들을 쫓는다고 했을 때 전체 영화에 어울리는 톤을 잡는 게 힘들지 않았나. 일단 NG가 나면 10분짜리 연기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그 톤을 유지하는 원칙이 있었나.

제일 중요한 원칙은 배우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살아 있고 표정이 좋으면 그대로 가고 카메라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주인공 세 사람이 워낙 살아온 배경이 달라 조율하는 게 힘들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고 보면 세 사람의 에너지가 일치되고 흐트러지는 게 느껴진다. 그들의 에너지가 넘치거나 모자라는 부분과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는 부분을 골라내는 작업이 흥미로웠다. 배우들은 그것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만.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는데 그곳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초반 15분가량이 고비인데 관객 가운데 20% 정도가 초반 15분 안에 자리를 떴다. 한 사람 한 사람 극장을 나가는 관객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그렇게 한 차례 나가고 나서 끝까지 본 관객은 아주 좋아했다. 임유진씨는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서부터 내내 울었다.

“송일곤 감독은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뭔지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자신의 영화가 국내보다 유럽에서 좋아하는 영화라는 얘기를 들어봤나.

유럽사람들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폴란드에서 영화공부를 했지만 유럽적 정서의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럽사람들도 자기들 정서라고 생각하고 보는 것 같지는 않고. 좀더 추상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에 조금 더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적 문법의 영화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송일곤 감독 영화의 특징인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다룬다는 게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론가 고 김현 선생님 말대로 “관념을 관념으로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리얼리즘 전통이 워낙 강해서인지 관념적인 것은 잘 용서가 안 되는 거 같다. 내가 어리기 때문에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관념적인 게 많을 수 있지만 기존의 리얼리즘이 관념적인 것보다 상위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세대를 지배했던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주제나 스타일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검열을 한다. 폴란드에서 영화를 찍을 때 좋았던 것은 그런 부담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관념이 결혼식장 가서 부조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꼭 해야 할 이유가 없지만 안 하면 나쁜 놈이 될 것 같아서 봉투를 내미는 것이다. 난 기존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존중하고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내 영화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념적인 영화도 있는 것이고 그것도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페데리코 펠리니의 <여인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저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싶었다. 꿈에서 꿈으로 연결되는 장면을 보면서 머리끝이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와 비슷한 세계를 기존 한국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런 것 같다. 내가 모르던 나의 실체를 알게 도와준다. 거울처럼 그 속에서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다양성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